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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에 파병된 北 공군…하노이영공 방어임무 실시
[역사의 현장] 베트남전쟁과 북한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2/14 [16:02]

<배정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베트남전쟁이 끝 난지 40여년 세월이 지나갔다. 베트남전쟁은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잊혀 진 전쟁이다. 5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 익숙한 월남’ ‘월맹20,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북한의 핵·미사일, 국민갈등과 국론분열의 한국을 바라보면, 베트남전쟁은 잊혀 져가는 역사적 사건 이상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게다가 베트남전쟁에는 한국군도 북한군도 참전하였다. 한국인들이 쉽게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미국 개입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

 

베트남은 1945년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독립을 맞이하였지만, 2차 대전 이전의 식민지 지배권을 주장하던 프랑스를 상대로 민족해방전쟁을 치러야 했다. 즉 북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한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는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고, 19547월에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제네바 휴전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의 이남 지역을 점령해 있던 프랑스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였고, 남베트남은 미국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 그 당시의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있었고, 북쪽은 공산주의, 남쪽은 자유주의 체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남쪽의 자유베트남은 그 내부에서 또 다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체제 지역과 농촌·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체제지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북위 17도 이남의 남베트남 지역 내부가 자유주의체제 지역과 공산주의체제지지 지역으로 나누어져 대립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베트남전쟁은 북위 17도 이남의 남베트남 지역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에 의해 시작되었다. 베트콩들이 자유베트남 정부의 관공서를 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소규모의 전투로 시작되었지만, 남베트남 정권의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 반정부 시위, 사회갈등과 국론 분열이 심화되면서 북베트남 정규군이 개입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는 전쟁 확전으로 이어졌다.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기에 호치민과 북베트남이 정규군을 남베트남 지역으로 침투시키면서 베트남전쟁은 게릴라전 수준을 넘어 정규전 규모의 수준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어 19648월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개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의 직후인 196485일 항공모함의 함재기로 하여금 북베트남의 해군기지, 유류 저장고 등을 폭격했다. 19652월부터는 북위 17도 군사분계선의 이남 지역에 국한시켰던 제 한전을 벗어나 북위 17도 이북 지역의 군사시설, 항구시설에 대한 공습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였다. 아울러 미국은 19653월에 해병 2개 대대를 다낭에 상륙시켰으며, 동년 5월 미국 지상군을 파병했다.

나아가 미국은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타이완 등 자유우방 25개 국가들에게 베트남전쟁의 지원을 위한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완, 태국, 스페인이 파병과 더불어 참전하였다. 한국은 196510월 청룡부대(해병여단)를 파병하고, 이어 맹호부대(육군) 백마부대(육군)등을 파병하였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자유우방 국가들이 전투부대, 비전투부대 등을 파병하였다.

 

평양서 연인원 800여명 게릴라 훈련

 

베트남전쟁이 국제화되면서 자유우방 국가들만이 남베트남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우방인 소련과 중국,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하였다.

미 공군의 하노이 폭격이 시작된 19652월 이후,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미사일, 미그기, 각종 전차와 야포 등 중화기를 지원해 주었다. 중국은 지상군 2개 대대, 고사포 사단 등을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북한도 북베트남에 적지 않은 전투병력, 물자 지원을 하였다. 한반도에서 미군과 대치하고 있던 북한은 반미 차원에서 즉 미국과의 투쟁차원에서 공군전투부대, 심리전부대, 특수전부대, 고사포 부대, 공병부대를 파병했다. 아울러 총기, 군복, 의약품, 식량 등 물자지원도 하였다.

북베트남에 파병된 북한공군은 주로 미 공군기의 공격으로부터 하노이 영공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0명의 북한 조종사들이 3-6개월 단위로 교대하며 파견되었다. 고사포 부대 역시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부터 하노이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심리전부대는 베트콩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군의 주둔지역까지 진출하여 청룡부대, 맹호부대 등 한국군을 상대로 한국어 심리전 방송과 납치, 회유, 귀순 등의 활동을 펼쳤다. 특수부대는 각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의 군사작전을 지원했다.

또 북한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의 활동을 현지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베트콩 전투원들을 북한으로 초청하여 3개월 단위의 게릴라 훈련을 평양 근교의 순안, 청진, 양원 등지에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연인원 약 800명을 훈련시켰다.

북한은 북베트남전쟁을 군사적, 비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의 실전 경험을 중시하였다.

특히 북한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대남전략에 활용하기 위해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공산화전략과 정치공작,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활동 등에 높은 관심을 표명하며 연구하였다.

북베트남에 파병된 공군하노이 영공방어 임무 실시

 

역사의 현장

베트남전쟁과 북한

 

베트남전쟁이 끝 난지 40여년 세월이 지나갔다. 베트남전쟁은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잊혀 진 전쟁이다. 5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 익숙한 월남’ ‘월맹20,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다.

그러나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북한의 핵·미사일, 국민갈등과 국론분열의 한국을 바라보면, 베트남전쟁은 잊혀 져가는 역사적 사건 이상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게다가 베트남전쟁에는 한국군도 북한군도 참전하였다. 한국인들이 쉽게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미국 개입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

 

베트남은 1945년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독립을 맞이하였지만, 2차 대전 이전의 식민지 지배권을 주장하던 프랑스를 상대로 민족해방전쟁을 치러야 했다. 즉 북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한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는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고, 19547월에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제네바 휴전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의 이남 지역을 점령해 있던 프랑스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였고, 남베트남은 미국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 그 당시의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있었고, 북쪽은 공산주의, 남쪽은 자유주의 체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남쪽의 자유베트남은 그 내부에서 또 다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체제 지역과 농촌·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체제지지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북위 17도 이남의 남베트남 지역 내부가 자유주의체제 지역과 공산주의체제지지 지역으로 나누어져 대립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베트남전쟁은 북위 17도 이남의 남베트남 지역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에 의해 시작되었다. 베트콩들이 자유베트남 정부의 관공서를 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소규모의 전투로 시작되었지만, 남베트남 정권의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 반정부 시위, 사회갈등과 국론 분열이 심화되면서 북베트남 정규군이 개입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는 전쟁 확전으로 이어졌다.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기에 호치민과 북베트남이 정규군을 남베트남 지역으로 침투시키면서 베트남전쟁은 게릴라전 수준을 넘어 정규전 규모의 수준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어 19648월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개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의 직후인 196485일 항공모함의 함재기로 하여금 북베트남의 해군기지, 유류 저장고 등을 폭격했다. 19652월부터는 북위 17도 군사분계선의 이남 지역에 국한시켰던 제 한전을 벗어나 북위 17도 이북 지역의 군사시설, 항구시설에 대한 공습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였다. 아울러 미국은 19653월에 해병 2개 대대를 다낭에 상륙시켰으며, 동년 5월 미국 지상군을 파병했다.

나아가 미국은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타이완 등 자유우방 25개 국가들에게 베트남전쟁의 지원을 위한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완, 태국, 스페인이 파병과 더불어 참전하였다. 한국은 196510월 청룡부대(해병여단)를 파병하고, 이어 맹호부대(육군) 백마부대(육군)등을 파병하였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자유우방 국가들이 전투부대, 비전투부대 등을 파병하였다.

 

평양서 연인원 800여명 게릴라 훈련

 

베트남전쟁이 국제화되면서 자유우방 국가들만이 남베트남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우방인 소련과 중국,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하였다.

미 공군의 하노이 폭격이 시작된 19652월 이후,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미사일, 미그기, 각종 전차와 야포 등 중화기를 지원해 주었다. 중국은 지상군 2개 대대, 고사포 사단 등을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북한도 북베트남에 적지 않은 전투병력, 물자 지원을 하였다. 한반도에서 미군과 대치하고 있던 북한은 반미 차원에서 즉 미국과의 투쟁차원에서 공군전투부대, 심리전부대, 특수전부대, 고사포 부대, 공병부대를 파병했다. 아울러 총기, 군복, 의약품, 식량 등 물자지원도 하였다.

북베트남에 파병된 북한공군은 주로 미 공군기의 공격으로부터 하노이 영공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0명의 북한 조종사들이 3-6개월 단위로 교대하며 파견되었다. 고사포 부대 역시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부터 하노이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심리전부대는 베트콩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군의 주둔지역까지 진출하여 청룡부대, 맹호부대 등 한국군을 상대로 한국어 심리전 방송과 납치, 회유, 귀순 등의 활동을 펼쳤다. 특수부대는 각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의 군사작전을 지원했다.

또 북한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의 활동을 현지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베트콩 전투원들을 북한으로 초청하여 3개월 단위의 게릴라 훈련을 평양 근교의 순안, 청진, 양원 등지에서 실시하기도 하였다. 연인원 약 800명을 훈련시켰다.

북한은 북베트남전쟁을 군사적, 비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의 실전 경험을 중시하였다.

특히 북한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대남전략에 활용하기 위해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공산화전략과 정치공작,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활동 등에 높은 관심을 표명하며 연구하였다.

 

 

 

배 정 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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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14 [16:02]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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