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1차 세계탈북민대회’ 개최하는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탈북민의 평화통일에 대한 의지 세계만방에 천명”‘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6/04/22 [15:47]

[인터뷰] 제1차 세계탈북민대회’ 개최하는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탈북민의 평화통일에 대한 의지 세계만방에 천명”‘

통일신문 | 입력 : 2016/04/22 [15:47]

지난 4월 15일은 죽은 김일성의 104회 생일이다. 살아있는 신에 가까운 김일성이 만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3대에 걸쳐 그의 손자(김정은)가 집권하도록 장장 70여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삶의 희망도 없어 보인다.

인간생지옥 그곳을 뛰쳐나온 3만 탈북민들의 증언은 김정은 독재정권의 반인륜적 인권탄압행위를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알렸다. 탈북민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북한사회의 모든 상황이 역사에 꼭 남겨야 할 귀중한 자산이 아닐까 싶다.
국내 2만 8천여, 해외 3천 명의 탈북민이 한자리에 모여 김정은 정권의 만행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 북한에 자유민주주의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오는 4월 29일 서울 명일동 월드글로리아센터에서 ‘제1차 세계탈북민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 집행위원장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을 19일 광화문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났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54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부모님이 모두 노동당원인 그야말로 수령충성의 가문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대에 입대하였으며 소속부대는 2군단 3사단 민경대대(DMZ 수색대대)이다. 21살 때 노동당에 입당하였고 9년간을 당과 수령을 위해 성실히 복무하였다.
▲귀순 동기와 경로는
제대 무렵 나는 장교가 되고 싶어 ‘김일성군사정치대학’을 간절히 원했다. 허나 상급 장교(정치부장)는 한사코 사회일반대학을 가라고 했다. 어떤 후보자에게 밀린 것 같았다. 이에 반발해 1979년 7월 휴전선을 넘어 남한으로 귀순했다.
▲당시 귀순자 대우는 어땠나?
우선 30평대 아파트 1채(당시 평균 매매가 3천만 원 정도)를 주었다. 정착금으로는 아파트 2채를 살 수 있는 액수의 돈과 선물(상품)이었다. 또한 본인이 원하는 대기업에 취직시켜주었다. 나는 귀순자특혜로 이명박 사장이 이끄는 현대건설에 대졸자격으로 취직했다. 내가 온 해에는 귀순자라고 2명뿐이었다.
▲또 다른 혜택도 있었나?
전국을 순회하며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각 도, 광역시까지 10여 개의 자치단체를 순회하며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인사를 받았다. 한 곳에 가면 보통 1톤 트럭 한 대 분량의 가전제품이나 가구를 살 수 있는 돈과 상품권을 받기도 했다.
 
당시 귀순자 2명…전국 순회 시민환영대회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인사 와 선물 받아
고려대서 학·석사 7년간 정치외교학 공부
 
▲사람들이 부러워했겠다.
그렇다. 오죽했으면 당시 남한 처녀들이 결혼하고 싶은 상대 3~4번째로 귀순용사를 선호하기도 했다. 그때는 조사기간이 대략 1년 정도였다. 사회로 나와 3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만큼 귀순자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라고 보면 된다.
▲공부를 많이 한 줄 안다.
고려대학교 학사 4년, 석사 3년, 합의 7년간 정치 외교학을 공부했다. 이후 건국대학교 대학원 7년을 마쳤다. 모두 14년간의 대학공부를 하였으니 적게 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죽도록 하기 싫어했던 공부를 남한에 와서 죽어라고 했다.
▲탈북 1호 박사라던데.
1997년 탈북민 1호 박사가 되었다. 휴전이후 최초여서 당시 언론에도 크게 소개되었다. 지금은 많은 탈북박사가 있는데 작년까지 모두 16명이다. 웃기는 건 저마다 1호라는 것이다. 북한학1호 박사, 여성1호 박사, 정치학1호 박사, 부부1호 박사, 약사1호 박사, 한의사1호 박사 등 분명히 1호 원조는 나다.
▲박사님을 우스갯소리로 ‘실향민’이라 하던데…
나는 엄연히 탈북민이다. (참고로 실향민은 해방 후부터 휴전이전까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임) 휴전이후 시작된 탈북시대는 김신조 목사가 ‘머리시대’이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에 온 사람들이 ‘다리시대’이다. 나는 중간쯤에 왔으니 ‘배꼽시대’라고 보면 될 듯하다.
▲세계북한연구센터는 어떤 단체인가?
내가 대표(소장)인 세계북한연구센터는 지난 2010년 7월 강남구 역삼동에서 개소했고 현재는 종로구 관철동에 있다. 본 단체는 탈북민 출신 북한전문가들과 외국의 저명한 북한연구학자들로 구성된 북한체제변화연구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다.
▲탈북민사회 TV스타이다.
림 작가처럼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배 아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그른데 없다. 탈북민들에게는 남이 잘 되는 꼴을 보면 혈압이 오르는 DNA가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정도가 심각하다는 생각이다.
▲제1차 세계탈북민대회 주제가 뭔가?
‘탈북은 과거! 통일은 미래! 자유는 영원!’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이번 대회에서 ‘세계탈북민위원회’를 결성하고 매년 4월 15일(김일성의 생일)을 ‘세계 탈북민의 날’로 선포한다. 아울러 ‘3만 탈북민 선언’을 통해 탈북민들의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자는데 있다.
▲대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회장은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고 준비위원장은 현병철 전 국가인권위원장이며 집행위원장을 내가 맡았다. 집행위 부위원장으로 강명도 교수,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 노현정 NK경제인연합 회장 등이다. 집행위원으로 탈북민 단체장 30~40명이 망라되었다.
 
4월 15일 ‘세계 탈북민의 날’로 선포
한국에 살고 있는 ‘3만 탈북민 선언’
통해 탈북민들의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
 
▲해외 탈북민 대표도 참가하는 줄 안다.
영국, 미국, 호주, 일본 등에서 온 7명의 해외 탈북민 대표가 참가하기로 했다. 국내에서는 500여 명의 탈북민들이 참가할 걸로 예정한다. 2회부터 해외순회 형식으로 개최하려는데 문제는 재정이다. 사실 본 대회를 2013년에 개최하려 했는데 자금사정으로 이번에 열렸다. 또한 탈북민단체간 협업이 미흡한 것도 현실이다.
▲탈북민단체가 단합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이유가 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탈북단체장들 서로가 잘났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일을 싫어하는 탈북민들이 가장 김정일처럼 산다. 감투에 욕심 많고 남의 것은 인정 안하고 오직 제 것만 최고라고 우기는 우월감이 결국은 자신을 망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그뿐인가, 남을 깔보고 비방·폄하하는 행위를 쉽게 한다. 그래 갖고는 백날 천 날 가도 안 된다. 합심하여 같이 살아간다면 우리는 한 목소리를 내며 통일한국의 주역이 되는 날개를 달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7월 결성, 탈북민 출신의
북한전문가들과 외국의 북한연구
학자들로 구성된 북한체제변화연구
싱크탱크…집행위원장직을 맡아
 
▲20대 총선 비례대표후보 낙마했다.
남한의 이익집단은 내부합의로 인지도가 높거나 대중의 신망이 좋은 후보를 한 명 준비해서 국회로 보내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탈북민은 어떤가? 나는 공개적으로 비례대표를 신청했고 비공개로 신청한 탈북민 후보가 10여 명이라고 한다. 그렇게 이합집산이 됐으니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예정된 것이다.
▲새누리당은 이번에 탈북민 국회의원을 낼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면.
그러니 답답하다. 탈북의원은 북한주민과 지역대표이다. 정부가 말로만 통일, 통일했지 실지는 그렇지 않음이 증명된 셈이다. 김정은이 보란 듯이, 그리고 2천만 북한주민들을 포용하는 심정으로 이번에도 탈북의원을 꼭 냈어야 했다. 북한인권법 통과를 위해 탈북단체장들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에 대한 작은 보답도 없으니…우리 탈북민들이 협력하는 힘이 약해서 인데 누구를 탓할까.
▲다음 총선에 생각 있나?
그때면 내 나이 67세가 된다. 나는 이제 2년 뒤, 그러니까 현재 재직 중인 국립한경대학 교수 임기가 끝나면 모든 사회활동에서 은퇴하려고 한다. 사람은 나이가 되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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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평양지하철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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