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 신은미 교수

“북한 여행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추억을 남겼다”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14/02/14 [16:42]

재외동포 신은미 교수

“북한 여행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추억을 남겼다”

통일신문 | 입력 : 2014/02/14 [16:42]

재미동포인 신은미 교수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라는 제목으로 북한여행기를 쓰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음악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신 교수는 호기심 때문에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을 여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북한을 여행한 후 이전과 달리 분단으로 인한 비극과 함께 통일에 대한 염원이 많이 커졌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북한, 특히 평양은 요즘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 여행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 여행이었고, 슬프도록 아름다웠다고 추억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의 분단이며, 잦은 교류를 통해 동포로서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방문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있었나.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이 다음 여행지를 찾다 인터넷을 통해 북한이 남한 국적자를 제외하곤 전 세계인에게 관광을 개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은 국적이 미국이니 우리도 갈 수가 있겠다며 ‘그곳도 우리나라의 일부인데 가보자’고 제의해 따라 나선 여행이었다.

첫 북한 여행은 정말 내키지 않은 여행이었다. 게다가 반공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난 세대이기 때문에, 북한이나 북한 동포에 대해서 그 어떤 평범한 인간적인 삶조차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잔잔한 충격과 함께 감동을 느끼게 되니 순식간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됐다. 내 마음을 여니 상대방도 허물없이 마음을 활짝 열어 순박하고 따스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줬다. 두 번째부터는 그곳에서 만난 동포들이 그리워 다시 가게 됐다. 지금은 평양에 수양딸도 있고 수양조카도 있다. 겨울에 다시 찾아가 보려 생각 중이다. 북한을 사계절 중 겨울에만 못 가봤기 때문이다.

▲북한을 다녀온 것에 대한 기사를 보니 2011년 10월, 2012년 4월, 5월 세 차례에 걸쳐 40여 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했고 지난 2013년 두 차례 더 다녀왔다. 비교적 최근에 북한을 다녀온 셈인데, 북한에 대한 인상이 궁금하다.

=우선 첫 북한 여행에 대해 얘기하자면, 한마디로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에 올린 연재를 마치고 출판을 할 때 책 제목을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라고 했다. 북한 여행을 통해 민족의 비극을 체험하고 생애 처음으로 민족애를 느끼면서 통일을 염원하게 됐으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런데 조국이 갈라져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나를 포함해 남한의 많은 국민들은 그동안 세뇌에 가까운 반공교육의 영향을 받아 북한 동포는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북한 동포에게서 뿜어 나오는 아름다운 인간성을 접하며,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절대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며 평화를 갈구하는 모습에서 호전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 또한 우리와 똑같이 분단의 무거운 짐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버겁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잠깐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감정이 풍부하고 동포애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가난했다. 지금도 지나간 기억들을 되살리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여행 중에 만난 따뜻한 북한 동포에 대한 기억에 아직도 가슴이 뭉클하고, 스쳐 지나는 사이에 비친 그들의 가난에 지금도 가슴이 에이듯 슬프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말해준다.

북한은 요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첫 북한 여행이 2011년 10월이었으며 마지막 여행은 2013년 9월이었다. 채 2년도 안 돼 나진-선봉 포함해 무려 여섯 번이나 갔으니 무척 자주 간 편이다. 사실 변화라는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 가 봐야 뚜렷이 느낄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갈 때 마다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변화는 아마 건설 붐 때문일 것이다. 지금 평양에는 대대적인 건설 붐이 일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건물들이 순식간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경우 건물을 하나 지으려면 몇 년이 걸린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몇 개월 만에 갔는데도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수십 층짜리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고급 레스토랑이나 백화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특히 북한 음식을 좋아해서 레스토랑에 관심이 많은데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그런 레스토랑들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물론 북한 동포들의 평균 소득을 생각하면 그런 레스토랑에 와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이제 평양에도 구매력을 갖춘 시민들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표정이 밝아졌다는 것도 느낄 수가 있다.

 

평양에는 대대적인 건설 붐이 일고 있어

고급 레스토랑이나 백화점들 많이 생겨나

 

분단의 무거운 짐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버겁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 사는

가난한 나라’ ...옷차림이나 표정 밝아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개 안내하는 사람과 동행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의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 뒷골목이나 재래시장 등을 가봐야 그 나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북한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생각하나.

=북한을 여행하는 동안 나의 관심은 ‘북한이 얼마나 잘 살고 못 사는지’가 아니라 ‘그들은 우리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언제든 바뀔 수가 있다. 그러나 남북의 동포들이 이질감으로 인해 함께할 수 없다면 통일은 한낱 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남과 북의 동포들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이루어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총 60일 동안 북한의 방방곡곡을 가봤는데, 다니다보면 동포들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보게 된다. 평양과 지방 사이에 격차가 크다고 느껴졌다. 그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정부도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진-선봉에서는 장마당에도 가봤다. 예전 우리의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 같았다. 물론 그런 곳에 가면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긴다. 바로 예전의 우리 모습 그대로였다.

 

여행하면서 관심은 ‘북한이 얼마나

잘 살고 못 사는지’가 아니라

그들은 우리와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까’라는 것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바뀔 수 있어

그러나 남북이 이질감으로 인해

함께할 수 없다면 통일은 꿈에 불과

 

▲주로 어떤 곳을 갔는지, 또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소개해 줄 수 있나. 만난 사람 중에 고위급 인사도 있었나.

=가는 곳은 주로 유적지를 비롯한 관광지들이다. 가본 곳을 나열하자면 평양, 평성, 남포, 사리원, 개성, 판문점, 해주, 신천, 묘향산, 원산, 금강산, 백두산, 삼지연, 나진-선봉, 청진, 칠보산, 함흥, 흥남 등이다.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북한 동포들을 만나게 되고 또 얘기를 나누게 된다. 특히 동포라고 말하면 아주 반갑게 맞아준다. 헤어질 때는 눈물을 글썽인다.

우리는 다른 제도 속에 살아왔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간부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는 ‘해외동포위원회’ 부국장이라는 분을 만났다. 해외동포위원회는 조선노동당 직속기구라는 것 같았다. 아마 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 상봉이라든가 아니면 북한에서의 사업 또는 투자 등을 도와주는 그런 기관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그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은 수양딸 설경이의 집 방문 때문이었다. 부국장이라는 분을 만났는데 안내원 영길 아우의 얘기로는 ‘상당히 높은 분’이라고 들었다. 우리하고는 직제가 다르니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청빈한 관리라는 느낌이었다. 좀 우스갯소리로 하자면, 도저히 높은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보통 ‘노동당 간부’라고 하면 무시무시하고, 거만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런데 흔히 만날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고 또 실제 그랬다. 헤어지면서 ‘오늘이 딸 생일이라 일찍 가야 한다’며 ‘일요일이라 관용차를 쓸 수가 없어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떴다.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그렇지 그날의 만남은 공적인 일인데 관용차를 놔두고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을 보며 청빈하다고 느꼈다.

▲북한은 최근 배급제가 원활하지 않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지 들은 내용이 있나.

=이런 얘기는 나눠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단지 추측일 뿐인데, 만일 배급이 원활하다면 장마당이 활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예전에 배급이 원활했을 때도 장마당은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사회주의 경제가 완전히 정착을 하게 되면 장마당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은 장마당에 가는 사람들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충분히 배급을 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다고 장마당까지 가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장마당이 활발하다면, 그만큼 반비례해 배급이 줄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북한에서는 이미 장마당을 통한 삶이 일상이 됐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 생활에 밀접한 상황이 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로 봐야 하나.

=글쎄, 잘 모르겠다. 나진-선봉에 있는 장마당의 경우 하루 이용객이 1만 명 정도 된다고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장을 본다고 가정하면 주당 각기 다른 7만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셈이다. 한 가정 당 식구를 네 명이라고 했을 때 28만 명의 주민이 이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나진-선봉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많은 사람들이 장마당에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여러 제약이 많이 있는 곳인데 수십일 넘게 북한의 여러 곳을 다녔기 때문에 나름 북한 여행의 노하우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주의할 점도 얘기해 달라.

=안내원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예를 들어 군인이나 군사시설 등 촬영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사실 북한에는 군인들이 굉장히 많다. 그러니 사진을 찍다 보면 군인들이 찍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안내원은 ‘혹시 군인이 찍혔으면 그 사진을 지워주시겠습니까?’라며 정중히 얘기를 해준다. 북한이 사진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광객으로 위장한 기자’들 때문이다.

언론사 기자들이 관광객으로 가장해 들어와서 안 좋은 사진들을 몰래 찍어 북한에 대한 악선전에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관광객으로 가장해 들어온 기자나 작가들이 올려놓은 악선전 영상물들을 볼 수 있다.

 

 

동포들이 얘기하는 통일이 ‘적화통일’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한국의 친구들과

통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통일의 주어가

‘주변 4대국’인데 북한의 동포들과

얘기를 나누면 통일의 주어가 ‘우리’라는 것이다.

 

▲북한을 여행하는 외국인이 많이 있는지 궁금하다. 외국인에게 있어 북한은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나.

=중국관광객들이 제일 많은데 연간 1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 유럽,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서방세계의 관광객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연간 1만 명에 달하는 것 같다. 북한에서는 지금 관광산업에 상당히 투자를 하고 있다. 특히 호텔을 많이 짓고 있다.

북한 관광은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여행이다. 서양의 관광회사들의 북한관광 선전 문구에 ‘Once in a Life-time Journey’라는 말이 있다. ‘일생에 한 번은 해볼 만한 여행’이라는 뜻이다. 북한 여행 경험을 통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북한은 세계에서 여행하기에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북한 주민들이 통일이나 남한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인가. 통일에 대한 얘기가 있다면 어떤 내용을 어떻게 말하나.

=얘기를 많이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6.15 시대로 돌아가 민족이 화해하고 단결해 평화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의 동포들이 얘기하는 통일이 소위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한국의 친구들과 통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통일의 주어가 ‘주변 4대국’인데 북한의 동포들과 얘기를 나누면 통일의 주어가 ‘우리’라는 것이다.

▲북한 여행에 대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며 여행기는 나의 삶에 대한 반성문이며 성찰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

=북한을 처음으로 여행하기 전까지는 북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또 종교적 신념을 다해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는 그런 나라였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북한에 가서야 비로소 북한 동포들이야 말로 내 그리운 반쪽 나라, 내 민족, 내 형제, 자매, 그리고 내가 사랑해야만 하는 내 이웃임을 알게 됐다. ‘하나님은 북한도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는 회개하는 심정으로 적어갔다.

▲북한을 여행하는 것에 대해 응원도 많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 여행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듣고 싶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북한으로 관광을 간다고 하니까 주위 사람들 반응이 한마디로 ‘어머, 돌았나봐! 거기가 어디라고 그곳으로 관광을 가나’였다. 더구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연평도, 천안함 등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최악인 상황이었으니 나올 만한 얘기였다. 그러나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2012년 4월과 5월에 연속 다녀오니 오히려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자기들은 우리가 ‘북한에 갔다 어쩌면 억류가 돼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니 북한이 자기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반응은 충분히 이해한다.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나 또한 비슷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의 여행을 할 때까지 나는 여행기를 쓸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만 내 자신을 돌아보며 일기 형식으로 기록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 UCLA에 교환학자로 와 계셨던 분이 여행담을 듣더니 나에게 서울의 <오마이뉴스>에 올리라고 추천을 해서 시작했다. 매회 수십만 명이 조회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남한의 동포들이 우리 민족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 너무 기뻤다.

물론 부정적인 댓글도 많이 있었다. ‘종북녀’, ‘좌빨’ 등등. 언젠가 서울의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는데 ‘종북녀’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솔직히 종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북한에 가서 동포들을 만나보고 민족애를 느끼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갖게 된 것이 종북이라면 나는 기꺼이 종북이 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여행기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실향민, 탈북민들로부터도 많은 쪽지를 받았다. 쪽지를 읽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 탈북민은 이런 말씀도 했다. 그는 ‘북에도 좋은 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얽매인 굴레 때문에 말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북에도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 신은미 선생께서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대로 정말 내 삶을 뒤 돌아보게 한 여행이었다. 북한 여행은 아름답고도 슬펐으며,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우리는 간혹 ‘남과 북은 이질감의 골이 너무 깊어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한다.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남과 북의 동포들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변하려 해도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에는 많은 우리의 동포들이 살고 있다. 미국에 사신지 30~40년이 지나도록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도 잘 살고 계신 분들도 있다.

미국이야말로 우리와는 이질감이 극치를 이루는 나라다. 하물며 북한의 동포들과 함께 하는데 이질감이 문제가 되겠나. 문제는 마음의 분단이다. 잦은 교류를 통해 동포로서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종영 기자 sisacolum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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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6/08/31 [13:33] 수정 | 삭제
  • 신씨는 한때 음대강사로도 일했고 미국시민권을 받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남편인 학원사업가 정태일씨와 재혼해 부부금슬을 자랑하며 살고있는분인데 남편의 북한여행제안으로 2011년 10월~2015년 10월까지 약 8차례나 북한여행을 다녀와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을 가다와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을 가다를 썼던분임~!!!! 그러나 재작년 11월 극우탈북자인 이순실씨와 김정아씨 송지영씨를 비롯한 극우보수종편출연중인 유명탈북자들에 의해 고소당한직후 결국 이렇게 되었지~!!!! ㅡㅡ;;;;;;
  • 박혜연 2016/08/31 [13:30] 수정 | 삭제
  • 단지 북한에 대해서 너무 좋은말을 했다는 이유로 일베회원에 의해 저질러진 토크콘서트 테러사건나게 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조사를 받고 2015년 1월10일날 강제출국되어 앞으로 약 5년동안은 대한민국입국이 전면금지된 당사자중 한사람임~!!!
칠보산 월락봉의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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