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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수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정치범이었다-2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3/07/15 [15:44]

신동혁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정치범이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매 맞아 죽었는데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니! 군복을 입은 선생님들에게 모든 권한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내가 10살 때인가 한번은 어머니 농촌 지원 전투에 나도 같이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학급은 마침 부모들의 작업반으로 지원 나갔다 우리들이 할 일은 모내기 전투였다. 아침 아홉시부터 우리는 작업을 시작 하였다. 각각 자기부모들이 맡은 포전에서 모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날 계획은 그날로 넘쳐 수행하여야 한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머리가 좀 아프다고 하였다. 아무리 머리가 아파도 나와서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거들어 주었다. 그러나 우리 모자가 맡은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러자 담당 보위 지도 요원의 입에서는 갖은 욕설이 튀여 나왔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맡고 있는 논두렁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점심 먹고 나올 때까지 있으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점심 먹으로 들어갔는데 어머니만 논두렁에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정확히 1시간 반 뒤 보위 지도원은 어머니에게 다시 일을 시작 하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이미 약할 때로 약해져 있었고 심하게 벌을 받았으며 점심조차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 쯤, 그녀가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그날 계획을 하지 못하여 그날 저녁 사상투쟁회의에서 비판무대에 올라서서 두 시간 동안을 무릎을 꿇고 무려 40명한테서 한 사람 한 사람 둘러가며 비판을 받았다.

내가 12살 나던 해,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엄마와 갈라져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수업 하는 날이 없고 매일 일만하였다. 김매기, 가을걷이, 거름 나르기 즉 농촌 지원 등 각종 일을 했다. 배우는 것 없이 일만하였다.

1998년 봄부터 1999년 가을까지 중형발전소 건설에 학생들이 참가했다. 학생들의 나이는 13살에서 16살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아이들이 사고로 죽는 것을 보았다. 그전에 공개처형과 시체들을 보긴 했지만 사고로 인한 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끔, 4명에서 5명의 아이들이 하루에 죽어나갔다.

한번은 실제 사고로 인해 8명이 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미장공 3명이 높은 콘크리트 벽 위에서 일하고 있었고 옆에서 이들을 보좌하는 15살짜리 여자아이 세 명과 남자아이 두 명이 있었다. 내가 회반죽을 싣고 가고 있을 때 아이들이 있던 시멘트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조심해!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고 있어!”라고 소리쳤지만 때는 늦었고 아이들은 무거운 시멘트벽 아래 깔렸다. 우리는 그들의 시체를 거둘 수 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보위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해!”라고 소리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일들은 수용소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중 하나 일 뿐이었다.

1996년 4월 6일 아침 8시 경 급하게 학교로 오라는 전달을 받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따라가니 운동장에 승용차 한 대가 서있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다짜고짜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눈을 보이지 않게 가리고 승용차 뒤에 태워 어디론가 한참을 데리고 갔다. 내 육감으로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방 같은 곳에 들어서면서 내 눈을 풀어주었다.

눈을 뜨니 방에는 아무것도 없고 책상과 의자에 사람 한명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나의 아버지 형제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첫째 큰아버지와 둘째 큰아버지가 50년 전쟁당시 치안대에 가담하였다가 월남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이 무엇 때문에 관리소에 들어왔는지 짐작되었다. 맨 아래에 내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곳이 바로 그 어느 곳에도 알려지지 않은 14호 수용소의 지하 감옥이었다. 나는 7호 감방에 들어갔다. 감방은 어둡고 작았으며 천장에 달려있는 작은 전기불외에 다른 빛은 없었다.

내가 금방 도착했을 적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엄마와 형이 도주를 기도하다가 새벽에 체포되었는데 우리 식구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도주를 시도하였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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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7/15 [15:44]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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