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정책은 대단히 성공적...북한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노태우 정부의 ‘평화공존’선언 ⑪ 하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6/03/26 [15:30]

북방정책은 대단히 성공적...북한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노태우 정부의 ‘평화공존’선언 ⑪ 하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6/03/26 [15:30]

남북은 199112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한반도에 핵무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마침 부시 미국 대통령이 1991928일 전 세계배치 전술핵무기 철수 및 폐기선언을 했다. 그 선언에 따라 미국은 우리나라에 배치한 핵무기를 철거했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19911218이 시각 우리나라의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핵부재 선언을 했다.

 

우리나라의 핵 부재선언과 북한 비핵화

 

북한 김일성과 김정일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핵통제가 느슨한 틈을 타서 겉으로 비핵화

협상을 하면서도 실상은 핵개발에 매달렸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한국 내 전술핵 부재를 확인해주었다. 노 대통령은 한국은 핵무기의 생산, 보유, 사용은 물론 재처리시설과 농축시설도 보유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의 동참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남북은 19911226일 회담에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북한은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검증이나 사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측이 당초 관철하고자 했던 남북간 상호 시범사찰과 의무적인 사찰에 동의하지 않았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는 이들 두 나라와 다른 길, 즉 핵무장으로 갔다. 비핵화에 관심 있는 척해서 한미는 199217일에 실시키로 한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하는 조치를 취해주었다. 북한은 빠른 시일 안에 핵비확산조약(NPT)의 기본협정인 IAEA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국제핵사찰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북한은 1992130일 핵안전협정에 서명은 했지만, 비준을 하지 않아 애를 먹이더니 4월경 비준하고 5월경 핵사찰에 응했다. IAEA와 우리 정부가 모든 수단을 써서 후속조치를 촉구함으로써 북한은 511일 마침내 IAEA에 영변 핵시설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핵통제가 느슨한 틈을 타서 겉으로 비핵화 협상을 하면서도 실상은 핵개발에 매달렸다. 비핵화,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이란 연막을 치고 실은 핵무장 하는 길로 간 것이다.

북한은 결과적으로 비핵화공동선언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동 선언에서 규정한 핵무기 시험, 제조, 생산 등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을 이미 어겼고, 보유하지 않기로 한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했다. 북한은 처음부터 이 선언을 지킬 의사가 없었다.

 

공산권 붕괴와 북방외교(北方外交)

 

노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 북방정책

냉전으로 수교관계가 없던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주된 대상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운이 좋았다. 시운을 잘 만나 국제정세가 우리나라에 좋게 전개됐다.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인 1989년은 냉전 해체의 해였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89122-3일 몰타선언을 통해 냉전의 종식과 미소간의 군비축소, 경제협력, 동유럽의 변혁 불간섭 등에 합의했다. 그러자 이해부터 동유럽에서 공산국가들의 체제붕괴, 체제전환이 시작됐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이미 상당한 개혁을 해온 터라 공산주의를 쉽게 벗어던졌다.

1989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국경선을 개방했는데, 휴가를 보내던 동독사람 수천명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이에 폴란드와 체코에 휴가 간 동독 사람들이 바르샤바와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들어가 이주를 요구하면서 그들 역시 서독으로 갔다.

1989년 후반이 되면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소극적인 이주 시위에서 점차 반체제세력의 결집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고 1989119일 갑작스레 베를린 장벽이 개방됐다. 운이든 착오든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동독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19903월 최초의 동독 자유선거에서 보수세력인 독일연합이 승리를 거뒀다.

1990518일 동서독은 경제사회 화폐통합에 합의하고 71일 발효했다. 같은 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동서독이 외무장관들이 참여하는 2+4회담을 시작해서 912일 모스크바에서 독일관련 최종 조약을 체결했다. 4대 전승국의 책임과 의무 종식, 기존 국경의 고정, 유럽에서 소련군 철수, 독일 군대의 축소 및 통일 독일의 완전한 주권행사가 정해졌다. 이 국제조약에 따라 독일은 103일 공식적으로 통일했다.

1991127일에 소련 대신 독립국가연합을 창설하면서 19911231일 소련이 해체됐다. 소련의 개혁, 개방,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의 체제 전환할 즈음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으로 소, , 동유럽 국가와 수교를 추진했다.

북방정책은 북한의 우방인 소련, 중국, 동유럽 공산국가를 상대로 관계개선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 통일의 여건을 조성해보자는 취지로 수립됐다.

이때 노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북방정책이었다. 먼저 냉전으로 수교관계가 없던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주된 대상이었다.

 

한중(韓中) 수교...중국의 문호개방

 

우리나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1972년에 일본의 타이완 단교, 1979

미국의 타이완 단교에 이어 1992년에

우리의 자유우방국 타이완과 단교했다

 

중국도 문호를 개방, 한중수교로 나왔다. 우리나라가 소련과 손잡자 중국이 따라온 것이다. 노 대통령의 시대적인 안목과 외교정책에서의 과감한 행보 덕이었다.

중국과는 1990년 서울과 베이징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하면서 사실상 영사기능을 수행했고, 무역규모 증대를 바탕으로 한소수교가 있은 지 18개월 만인 1992824일에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대신 우리나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1972년에 일본의 타이완 단교, 1979년 미국의 타이완 단교에 이어 1992년에 우리의 자유우방국 타이완과 단교했다.

피해국 타이완은 우리나라의 단교조치에 분노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를 추진하면서도 타이완측에 중국과 수교하지 않을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타이완 국민은 섭섭함을 지나쳐 분개했고 결국 보복조치로 한국과 타이완 사이 항공노선을 중단했다. 운항재개는 12년 후에 이뤄졌다.

한중관계 정상화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친 영향은 컸다.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의 무역규모가 미국, 일본보다 더 커진 것은 이 한중수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휴전협정의 중요한 상대방이자 한국전쟁 때 총부리를 겨누었던 중국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사실상 북한을 뺀 모든 나라와 화해했음을 나타낸다. 전쟁 당사국끼리 별도의 평화협정을 맺지 않아도 남북간만 화해하면 평화협정을 맺은 거나 마찬가지 상태가 된 것이다.

이 북방정책 성공의 바탕에는 우리 경제력이 있었다. 동유럽 나라들은 경제부흥을 위해 해외직접투자 유치를 위해 우리나라와 같은 공업국가와 수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후로 우리나라는 냉전기 서방만을 상대로 하는 외교에서 탈피해 세계 모든 나라를 상대로 하는 전방위적 외교를 하게 됐다. 노태우정부의 외교, 북방정책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에 반해 북한을 국제사회에 정상국가로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다.

우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북한이 흐름을 타지 않았다. 사회주의 형제국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 대한민국에 붙을 때는 북한은 흐름을 막을 수 없으면 편승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 흐름을 막으려다 모든 것을 잃고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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