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대성동 마을시찰...통일정책, 현장중심에서 바라보겠다는 의지 보여[기획] 57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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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문도 국토통일원 장관 |
또한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 핵심 대북 정책은 여전히 국가안전기획부가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대화 업무가 통일원으로 이관되면서 장관의 위상이 다소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남북협상 성과를 만들어내기에는 제도적 한계가 있었다. 허 장관은 이런 구조적 제약 속에서 임기를 시작했다.
▉ 현장 행정과 정책 메시지 중심의 활동
남북관계에서 한국이 보다 포용적 자세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른바
‘대북 맏형 정책’이라는 표현을 제시하기도
허문도 장관은 1986년 8월 개각에서 제13대 국토통일원 장관이 된 이래 적극적인 현장 행보로 임기를 시작했다. 임명된 지 일주일 9월 초 판문점을 방문해 대한적십자사 전방사무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대성동 마을 등을 시찰하며 남북대치현장을 직접 점검했다. 이러한 일정은 통일정책을 현장중심에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보로 평가됐다.
그해 10월 경주에서 열린 민족통일 촉진대회에서는 국민적 단결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통일 문제를 국가적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특히 지도력과 국민적 구심점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국제 스포츠 행사로 높아진 자부심을 통일역량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외적으로도 통일정책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일본에서 열린 재일민단 창단 40주년 행사에서 대통령의 치사를 대독하며 북한에게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같은 해 북한 김일성 사망설이 확산되자, 허 장관은 외교부 등 관계 부처장관과 함께 긴급 대응 체제를 가동하며 북한 내부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는 등 위기관리에 나섰다. 안보문제와 관련된 정책대응도 이어졌다.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다는 정보를 공개하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이른바 ‘평화의 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허문도 장관은 국방·건설·문화공보부 장관과 함께 발표한 합동 담화를 통해 해당 사업을 북한의 수공 가능성에 대비한 자위적 조치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남북회담의 교착상황을 분석한 남북대화 백서를 발표하면서 한민족이 서로 대화, 소통되지 않는 이유로 북한의 폐쇄성과 혁명노선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남북관계에서 한국이 보다 포용적인 자세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른바 ‘대북 맏형 정책’이라는 표현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피를 나눈 형제간이나 마찬가지인 북한을 단지 적대적 대상으로만 보기보다 한민족 내부의 관계 속에서 관리하고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정책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구상과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남북회담이 재개되거나 구체적인 합의가 도출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 강경한 반공·민족주의적 통일관 강조
북한을 포용적으로 이끌어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하고, 국내에서는 이념적 분열을
극복해 국민적 단결 이뤄야 한다고 설명
허문도 장관은 언론인 토론회 등에서 좌경 운동권의 통일전선 전술이 국내정치와 민주화 구호 속에 침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강경한 반공·민족주의적 통일관을 강조했다. 특히 야당을 지목해 당의 정강 속 통일정책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상대화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부정책과의 차이와 그로 인한 위험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에 대해 야당은 통일정책이 기존정부의 통일방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반박했고, 정부 편에 선 여당이 가세해 한동안 통일이념논쟁이 이어졌다. 그러자 당시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민주화와 개헌이라는 시급한 정치현안을 앞둔 상황에서 통일문제가 정치적 논쟁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8년 1월, 서울 잠실에서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발표 6주년을 기념하는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전두환 정부 통일정책을 마무리하는 상징적 행사의 성격을 띠었다.
허문도 장관은 경과보고에서 북한을 포용적으로 이끌어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하고, 국내에서는 이념적 분열을 극복해 국민적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들은 그의 임기동안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던 만큼 아쉬움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결국 다음 노태우 정부에게 기대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인물 약력]
1940년: 경남 고성 출생, 부산고, 서울대 농과대 졸업
1964년: 조선일보 기자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임명
1980년 6월~11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언론통폐합' 주도 (전국 64개 언론사를 18개로 재편)
1980년 12월: 언론 규제를 골자로 한 「언론기본법」 시행 주도
1982년~1984년: 제7대 문화공보부 차관 역임
1984년~1986년: 대통령비서실 정무제1수석비서관 (학원안정법 추진 무산)
1986년 8월~1988년 2월:제13대 국토통일원 장관 재임
※ 이 시기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전두환 정권의 핵심 실세인 '3허(三許)'로 불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