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제 사회 전반 의제로 확장...대화의 지평 북쪽으로 펼치겠다"[기획] 57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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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기 통릴원 장관 |
마침 전두환 대통령도 1985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남북당국최고책임자 회담을 다시 한번 제의하며 대화재개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었다. 이세기 장관은 이러한 기조를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첫 무대는 이산가족을 필두로 한 국민이었다. 3월 29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국토통일원 주관 ‘제1차 통일대화의 광장’에 이 장관은 홍성철 황해도민회장을 비롯한 이산가족 대표 500여 명과 함께 참석해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산가족들의 절절한 사연과 건의사항을 경청한 그는 이날 행사에 그치지 않고 종교계 지도자, 가정주부, 근로청소년, 대학생 등 다양한 계층과 잇달아 대화를 이어가며 통일문제를 사회 전반의 의제로 확장해 나갔다. 대화의 지평을 북쪽으로 펼쳐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4월 1일, 이 장관은 “북한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한다면 남측도 관광지를 개방해 북한과 공동 개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서울에서 발행되는 영자 월간지 『디플로머시(Diplomacy)』 30일자 인터뷰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구상을 다음과 같이 내놓았다.
설악산에서 휴전선에 이르는 해안·산악 관광지대를 개방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상응 조치로 북한이 금강산을 개방해줄 것을 요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경색된 군사 대결구도를 비정치적인 ‘관광’ 분야로 옮기겠다는 구상이었다. 이 무렵 북한은 국회회담을 제안했다. 당국회담이 아닌 제의여서 정부는 지켜볼 따름이었다.
4월 9일,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채문식 국회의장 앞으로 서한을 보내 남북불가침 공동선언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국회 회담 개최와 이를 위한 예비접촉을 5월 초 판문점에서 갖자고 제의했다.
우리측의 남북국회 회담 예비접촉 개최 수락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첫 남북국회 회담 열려
1차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관련 제1차
2차 실무대표접촉 판문점서 열려...성사 계기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미 5월 17일 남북경제회담, 5월 28일 남북적십자회담이 예정돼 있었고 국회가 구성 중이라는 이유로 즉각적인 답변을 유보했다. 외교무대에서도 이세기 장관의 역할은 이어졌다.4월 23일, 그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반둥회의 30주년 기념행사에 외무부 장관을 대신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우쉐촹(吳學謙)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협조를 요청했고, 참가 시사를 전달받는 성과를 거뒀다.
더 주목할 대목은 남북 접촉이었다. 반둥에서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장 손성필을 만나 한 달 뒤 예정된 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고, 이는 결국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상호 교환 방문이 성사되는 계기가 됐다.
5월에 제2차 남북경제회담(5.17)이 열렸지만,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중단된 지 12년 만에 열린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5.27∼30)에서는 시범사업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을 교환하기로 하는데 합의했다.
6월 3일 국회는 북한의 제안과 관련, 이재형 의장 명의로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앞으로 서한을 보내 “대한민국 국회는 통일헌법 제정을 위한 남북간의 협의기구 구성 문제와 통일기반 조성에 필요한 사항을 토의하기 위한 남북국회회담 개최를 환영한다.”고 밝히고, 이에 따른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쌍방 국회의원 각 5명이 참가하는 예비접촉을 7월중 판문점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였다.
6월 20일 제3차 남북경제회담에서는 우리측은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방안에 대한 양측의 공통점을 정리하여 합의하는 동시에, 북한측이 주장하는 부총리급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의하여 북한측의 동의를 얻어냈다.
7월 5일 북한은 국회의 제의를 받고 한 달여 지난 시점에 우리측의 남북국회 회담 예비접촉 개최를 수락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남북국회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7월 15일에 제1차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관련 제1차 실무대표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렸고, 7월 19일 제2차 실무대표접촉이 열렸다. 나중에 합의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고향방문 장소로 서울, 평양을 주장하는 북한과 각자의 고향으로 가보자는 우리측 주장이 엇갈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7월 23일 남북국회 회담 개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제1차 예비접촉이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일정만 합의했다.
쟁점이 된 것은 북측이 들고 나온 ‘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 문제’였다. 북측은 국회회담에서 우선적으로 토의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세기 장관은 “불가침 공동선언문제는 기본적으로 양측 정부 당국자간에 협의, 해결해야 할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북한의 3자 회담 주장에 대해서도 실효성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측의 남북한 당사자 해결원칙을 받아들여 조속히 남북한 정상회담에 나오라”고 촉구했다.
여기까지였다. 1985년 8월 1일 집권 민정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은 내각과 민정당 당직 일부를 개편하면서 당 원내총무에 이세기 통일원장관을 임명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박동진 의원 (민정·전국구)을 임명했다. 이세기 통일원장관은 사임하면서 “남북한 문제가 꽃을 피우기 전에 떠나게 돼 못내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 이세기 장관과 집권하기전 중국의 시진평 |
[인물 약력]
1936년 경기도 개풍군 출생. 부산 동아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 학생회장 재학 중이던 1960년 4·19혁명에 참여해 ‘4·18 고려대 학생 의거’ 선언문을 낭독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원 시절 김상협 교수에게 중국정치론을 배웠다. 박사논문 「중·소 대립의 맥락 속에서 본 한국전쟁 발발의 일원인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을 중·소 관계의 역동성 속에서 재해석했다. 1970년대 후반 일본 도쿄대학에서 중·소 대립과 한국전쟁의 연관성을 연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