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방안 마련... 북한에 제안하며 남북대화의 끈 놓지 않았다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전두환 정부의 냉탕 온탕 통일정책 ⑨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5/12/22 [19:42]

통일방안 마련... 북한에 제안하며 남북대화의 끈 놓지 않았다

[기획] 역대 대통령의 통일정책...전두환 정부의 냉탕 온탕 통일정책 ⑨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5/12/22 [19:42]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이후 7년 반이라는 긴 임기 동안 북한과의 관계에서 대담하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고 여러 차례 총리, 장관급 남북회담을 제의하지만, 평양의 반응은 1960년대 말의 강경 대남 무력 적화노선을 방불케한 군사도발로 나왔다.

 

권력 장악 과정만큼이나 거센 국민의 반발 속에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 하려는 듯 박정희 유신정권과 유사하게 적극적인 남북대화 공세를 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이 손짓을 대화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두환 정권의 비민주적 통치와 국내의 혼란을 파고들어, 휴전선을 넘어서는 극단적 테러라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그럼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방안을 마련해 북한에 제안하며 남북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정상회담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남북 간에 엇박자가 적지 않았지만, 그 시대만큼 심한 엇박자가 없었다.

 

역대 최초로 남북정상회담 추진

북한에 정상회담제의 많이 한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으로 통일에 돌파구를 열려는 계획은 진심이었다. 실제 전두환 대통령만큼 북한에 정상회담제의를 많이 한 대통령이 이전에 없었고 이후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198091일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북한에 남북한 당국의 최고 책임자간 상호 방문을 제의했다.

1981년 신년 국정연설에서도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김일성을 서울에 초청하고 자신도 평양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같은 해 65일 다시 한번 더 남북 당국 최고 책임자간 직접회담을 제의했다. 장소는 서울, 평양 어디든 좋다고 말했다.

미얀마 테러가 발생하는 1983년 국정연설에서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을 제의하면서 긴장완화, 전쟁재발 방지, 통일방안을 협의하자고 했다.

1984년에 북한의 인도적인 수재물자를 지원받은 것을 계기로 전 대통령은 1985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또 다시 남북 당국 최고책임자 회담을 제의했다. 이어 65일 평통 자문회의 개회사에서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수용을 촉구했다.

이어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북측과 협의하게 했다. 안기부는 남북적십자회담을 할 때 북한의 노동당과 비밀접촉을 하고 급을 올려 고위급 사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예비접촉을 계속했다. 협의해보니, 남북 간에는 정상회담의 접근방법에 차이가 있었다.

우리측은 남북이 통상적으로 외교하는 사이가 아닌 만큼 의제를 정하고 합의안을 만들기보다 전두환 대통령의 스타일답게 일단 만나자, 허심탄회하게 대화해보자는 입장이었고 북측은 미리 의제에 대해 실무적으로 합의해놓은 뒤 두 정상이 만나자는 입장이었다.

북측이 합리적인 듯이 보이지만, 남북 간에 정치군사 분야 의제를 합의하기 어렵고 합의된 의제에 관해 합의서를 만드는 것은 더 어렵다는 실정을 감안하면 우리측이 더 진정성이 있었다북한은 만나지 않으려고 난관을 조성하는 듯했다.

198594일부터 6일까지 북한의 허담 특사 일행이 서울에 왔다. 우리측에서는 답례차 장세동 안기부장, 박철언 보좌관이 1016일부터 18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다양측은 원칙적으로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으나 거기까지였고, 더 진전되지 않았다. 전 대통령은 임기가 만료되는 해까지 북한 최고당국자와 만나길 희망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전 대통령과 김일성은 통일문제, 주한미군, 한미군사훈련, 비방중상, 불가침선언 등을 가지고 서면으로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주로 정치군사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그러다가 대화가 진행 중인 19851020일 북한이 부산 청사포 해안으로 간첩선을 보내자, 대화 분위기는 깨졌다.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이 처음 기대와 달리 깊이 들어갈수록 만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고 또 만나도 얻을 게 없겠다는 결론에 이른데다, 김일성이 간첩선을 보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감이라 할까, 김일성이란 인간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7개항의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 체결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대북 제의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정부의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발표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 남북한의 주민대표가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그 헌법에 따라 통일국가를 완성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안에 따른 통일을 하려면 남북한 각자가 어느 한쪽의 사상, 이념, 제도를 앞세운 통일을 고집해서는 안 되며, 남북한 주민 전체의 자유의사에 의해야 하며, 어느 특정 계층이나 집단이 독점적, 배타적으로 주도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 주민 전체의 의사가 반영되고 또 뜻을 모아야 하는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이해 위에서 잠정적으로 남북한 간에 신뢰를 조성하고 민족적 화합을 실현할 수 있는 관계로 전환하자고 하면서, 그 실천 조치로서 7개항의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7개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상호관계 유지

둘째, 분쟁해결시 무력 및 폭력의 사용 또는 위협의 완전한 지양 및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해결

셋째, 현존 남북한의 상이한 정치질서와 사회제도의 인정 및 상대방의 내부문제 일절 불간섭

넷째, 현 휴전체제의 유지 및 군비경쟁의 지양과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문제 협의

다섯째, 민족적 신뢰와 화합 분위기 조성을 위해 상호교류, 협력을 통한 사회적 개방 추진

여섯째, 남북이 각기 체결한 모든 쌍무적, 다자간 국제조약과 협정의 존중, 민족이익에 관한 문제 상호협의

일곱째, 서울과 평양에 각료급 전권대표가 있는 상주연락대표부의 설치였다.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그 방안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의 남북관계에 대한 합의안은 나름대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82126일 남북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을 2개 국가의 영구 분열방안이라며 거부했다.

198221일 통일원장관은 후속 대북성명을 통해 20개 시범 실천사업을 제의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 과도기적 기간에 실천해야 할 시범 실천사업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1. 서울-평양간 도로의 연결, 개통

2. 이산가족들간 우편교류와 상봉 실현

3. 설악산 이북과 금강산 이남지역을 관광 휴양지로 설정해 자유관광 공동지역으로 개방

4. 해외동포들의 방문을 공동으로 주관하고 판문점을 통과해 쌍방지역을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보장

5. 인천항과 남포항을 우선적으로 개방.

6. 쌍방 정규방송을 자유로이 청취

7. 1986년 아시안경기대회와 1988년 올림픽대회에 북한선수단 판문점 통과 참가 보장

8. 외국인이 판문점을 통과해 쌍방지역을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보장

9. 남북 어부들을 위한 자유로운 공동어로구역 설정.

10. 각계 인사간의 상호 친선방문 실시

11. 쌍방 기자들의 상대방 지역 내에서의 자유로운 취재활동 보장.

12. 민족 사이 공동연구 추진

13. 국제경기에서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

14. 일용생산품의 교역

15. 남북 간 자연자원의 공동개발 및 공동이익의 실현.

16. 동일 제조업체간의 기술자 교류 및 생산품 전시회를 교환, 개최

17. 비무장지대내 공동경기장을 만들고 이를 남북간 친선경기에 이용

18. 비무장지대 내 동식물 자연생태계에 대한 공동학술조사

19. 비무장지대 내 군사시설을 완전히 철거

20. 남북간에 군비통제장치를 협의해 쌍방 군사책임자간에 직통전화 설치, 운용 등 이러한 세부적인 협력 방안은 후대 정부에서 실천하게 되는 것으로 선구적인 제의였다그러나 북한은 그 당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수했다.

김일성은 19801010일 열린 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공표한 바 있다.

두 개의 한국을 하나의 연방으로 묶고 우리 민족끼리정치군사 문제를 토의,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말한 연방제는 한 나라에 남북한의 두 정권, 두 제도를 공존한 상태 그대로를 통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식의 연방으로는 우리나라를 통일시킬 수 없다. 또 그것이 통일방안으로 부적당한 이유로는 첫 번째로 한 나라 안에 공산주의와 반공주의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두 개의 제도로 살 수 있다는 주장("남조선 제도는 그대로 두고 북조선 제도도 그대로 두고 서로 자치를 하면서 이 두 개의 정부를 연방해서 한 개의 나라로 만들어 가지고 유엔에 가입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든 지간에 이 국제적으로 분열된 조선을 영구화시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야 한 개의 나라, 두 개의 정권 이걸 명백히 해야 해”, "중국 사람들, 한 나라에 두 개 제도를 벌써 실현하고 있지 않소. 내 이번에 갔을 때 등소평이 말하지 않소. 자기가 좋은 일 하나 했는데, 더 늙기 전에 홍콩은 거저 50년간을 자본주의 사회 그대로 두고서 그저 평화적으로 통일하겠다. 잘한 게지요. 그러니까 한 개 나라에 두 개 제도는 있을 수 있다는 문제 아니오. 우리도 그렇게 두 개의 제도를 하잔 말이오.", 김일성이 신상옥최은희에게 한 말, 월간조선사, 2001)은 김일성 왕조가 구축돼 있는 북한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주장과 같다.

두 번째로 정치 이념이 다른 남북을 연방으로 묶는다 해도 그것은 통일의 상태라고 할 수 없다. 결코 통일이 아닐뿐더러 장차 예멘처럼 분쟁을 겪고 심하면 전쟁까지 할 수 있는 임시 봉합에 불과하다.

세 번째로 통일방안이라면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하는지의 견지에서 체제를 선택하게 해야지, 차이와 갈등을 숨기고 함께 연방으로 묶고 만족한다면 결국 북한 독재체제를 온존시키고 북한주민의 삶의 질을 아랑곳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어서 용납하기 어렵다.

마지막 실현가능성 문제로서, 북한이 과연 자기 주민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면서 연방제 통일방안으로 남북한 모두를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복지를 보장해 줄 수 있겠는가, 아마도 대한민국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미얀마 국빈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겨냥한 북한의 폭탄테러 암살 미수 사건

 

북한은 1983109일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해 폭탄 테러를 시도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안전했지만, 동행했던 정부 대표단이 희생됐다.

북한의 테러범들은 미얀마 국립묘지의 아웅산 묘소에 미리 폭탄을 설치해놓고 우리 정부 대표단이 참배할 때를 겨냥해 폭탄을 터뜨렸으나, 대통령이 행사장에 오기 전이어서 미수에 그쳤다.

북한의 테러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재익 경제수석 등 대통령을 수행한 외교사절 등 17명이 죽었다. 훌륭한 인재들이 한꺼번에 희생돼 국가적 손실이 컸고 국민이 애석해 했다.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사상자가 31명이나 됐다.

현지 의료시설이 부족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은 즉시 부상자들을 필리핀의 클라크 미 공군기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북한의 이와 같은 테러행위는 전 세계적인 규탄을 받았다. 전 대통령은 해외 순방 일정을 모두 중단하고 급거 귀국했다.

미얀마정부는 우리 정부에 사죄하는 한편, 폭탄을 설치한 북한 테러범을 전국에 수배, 체포했다. 미얀마 당국이 조사한 결과 테러범은 예상대로 북한이 보낸 공작원이었다. 미얀마 정부는 북한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국가승인도 취소하는 조치를 취했다.

세 명 중 한 명은 사살되고 조장은 함구로 일관하다가 처형됐으며, 나머지 공작원 강민철은 북한에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는 북한 당국이 사건을 발뺌으로 일관한 데다 자신을 소모품처럼 버린 것에 분개했다. 왜냐하면, 그가 소지한 수류탄에는 공작원 몰래 자폭장치가 되어 있어 안전핀을 뽑는 즉시 폭발함으로써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장치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강민철이 치를 떨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공작 완수 후 항구로 오라고 했지만, 랑군강 하류로 내려올 무렵 탈출선은 이미 항구를 떠나고 없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오면 구원하겠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버려졌다그래서 강민철은 테러 모의부터 훈련, 파견, 폭파하기까지 테러행위 일체를 털어놨다.

북한이 테러한 이유는 우리 내부를 이간, 분열시키고 동시에 한반도가 위험하다는 점을 부각, 서울 올림픽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특히 전두환 대통령의 국내 지지도가 낮은 점을 기회로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다.

전 대통령은 귀국해서 국가 원수의 위해(危害) 기도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하면서도 북한에 대한 궁극적 보복은 통일과 번영”, “북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은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고 국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해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일이라고 했다.

미국의 의견도 보복이나 확전을 원치 않았다.

1013일 여의도에서 테러 희생자에 대한 합동 국민장을 치렀으며, 영결식에는 백만 인파가 몰려와 애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무익한 전쟁을 막고 국민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북한과 대화에 나서며 국면을 바꾸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 미얀마 랑군 테러 사건과 관련, 우리 정부는 198449일부터 525일까지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체육회담 때 북한측에 테러 시인, 사과 및 납득할 만한 조치를 요구했다. 북측은 이에 대해 미얀마 테러를 날조라고 발뺌하며 대화를 중단하고 가버렸다.

198594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 허담 특사 일행이 서울에 오자, 전 대통령은 장 안기부장을 통해 아웅산 테러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나 유감표명을 요구했다. 북한의 허담은 시인, 사과를 요구하면 정상회담은 물 건너간다며 역사에 맡기자, 과거를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앞으로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고 말했다.

 

김포국제공항 폭탄테러, 대한항공 858

공중폭파사건, 평화의 댐 건설

 

1986920일로 예정된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손님을 맞아야 할 공항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개막식을 5일 앞둔 914일 오후 3시경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바깥 스테인레스 쓰레기통에서 폭탄이 터져 일가족 4명 등 5명이 죽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범인은 잡지 못했지만, 범행 수법은 버마 랑군 테러 때의 폭발과 비슷했다. 나중에 동독 슈타지 문서 공개로 알려진 바로는 김일성이 배후 조종하고 PLO 출신 청부 테러리스트와 서독 적군파가 실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해 지난 1987년에 북한은 더 큰 테러를 저질렀다.

19871129일 이라크의 바그다드 발 아부다비 경유 서울행 KAL기가 미얀마 남쪽 해상에서 교신한 후 사라졌다. 이 사건은 북한의 공작원이 시한장치 폭발물을 비행기에 실어 비행 중에 폭발이 일어나도록 만든 테러행위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일하고 귀국하던 우리 근로자를 포함한 승객 115명이 죽었다범죄 혐의로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은 일본인 부녀 관광객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들이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바레인에서 나이많은 남성과 젊은 여성 둘을 체포하자, 남성은 그 자리에서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하고 여성은 생포됐다. 마유미로 불린 범죄자 김현희는 논란을 빚은 대선 하루 전인 1215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속에 서울에 들어왔다.

김현희는 한 달 후인 1988125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북한공작원으로서 KAL기 폭파사건의 주범이었음을 실토하고, 북한이 테러를 저지르게 한 것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실제 북한은 19878월에 서울올림픽 북한참가 관련 우리 정부와 IOC의 제안을 거부한 뒤 9월 다시 협상을 제의했다가 거부되자, 10월에 김정일이 직접 이 테러를 지시했다.

해외공작원이었던 일흔살의 김승일과 스물다섯살의 김현희가 호출되어 평양 용성초대소에서 임무를 부여받았다.

정부는 북한을 강력히 비난했으나, 북한은 체포된 공작원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발뺌으로 일관했다.

미국은 항공기 테러행위를 규탄하면서 북한을 반()테러법에 의한 테러지원국가로 지정하고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북한은 대외교역이 봉쇄되면서 자급자족의 경제, 제조업 파탄의 상황이 됐다.

1986년에는 북한이 서울을 수공(水攻) 위협하는 일이 있었다.

그해 봄 북한은 병사들을 동원해 금강산 계곡의 물길을 막는 댐공사를 벌였다.

화천댐 상류 휴전선 이북의 물줄기를 막아 임남댐이라는 댐을 조성하는 한편, 동해안 쪽으로 유역변경식 발전소를 지었다. 남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가두어 동해쪽으로 돌려 발전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하면 물론 고도 차이를 이용해 발전할 수 있겠지만, 하류 지역의 남쪽은 어떻게 되겠는가? 물이 고갈되면서 하류 생태계가 파괴될 것이다.

방북자가 2007년에 원산의 남대천을 가보니 도도한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한강 유역에서 농사지을 물이 그렇게 버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우리쪽 지역의 수자원 이용과 밀접한데도 우리측과 협의를 하지 않고 댐을 건설했다. 우리측이 댐 건설 중단시 북한의 전력 손실 보상 용의, 남북 수자원 공동이용을 내걸고 회담을 제의했지만, 북한은 협의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로서는 북한의 댐 건설의 의도와 우리측에 미치는 영향 등 꼼꼼히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북한이 선의의 댐 건설을 하는지 우리측을 위험에 빠트릴 불순한 동기를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북한의 수도 서울에 대한 수공 위협은 그때 나왔다.

대책으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댐을 하류쪽에 설치해 북한의 수공 위협을 원천 봉쇄키로 결정했다. 1987228일 우리 정부는 북한의 수공이나 갑작스런 방류에 대비해 평화의 댐을 건설했다현재까지 북한의 수공은 없었지만, 평화의 댐 북쪽 상류로부터 물이 흘러오지 않아 내가 마르고 계곡이 삭막해졌다.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

물자를 마련 위해 공장 풀가동

 

19849월 초 문산 등 임진강변 일대가 5일간의 집중호우로 수해가 발생하면서 지역민들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 이때 북한은 뜻밖의 제의를 했다. 98일 수해를 입은 이재민들에게 쌀과 옷감, 시멘트 등을 인도적으로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은 우리측이 수재 물자를 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으로 보고 선전 차원에서 제안했다. 물론 우리 정부 역시 실무 부서의 의견대로 북한의 상투적이고 선전적인 제의에 호응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남북간 우월이 가려진 마당에 북의 인도적 지원 제의에 소극적일 필요가 없고 또 자신 있게 받으면 북한의 물자 수준도 알고 교류의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정부내 찬성 의견이 많았다.

전 대통령도 북한이 마음에 없는 장난질을 그만두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북측 제의를 받도록 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북한의 지원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 남북간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었다.

1984914일 우리 정부는 북한이 제공하겠다는 쌀 5만석, 50만 미터, 시멘트 10만톤, 기타 의약품 등 구호물자를 받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런 상황 전개에 북한이 무척 당황했다. 의표를 찔린 것이다. 설마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 확실했다.

김일성은 1년 뒤 우리측 인사를 만났을 때 전 대통령이 용감하다고 말했다. 탈북한 사람들은 당시 북한의 상황을 날벼락을 맞은 것으로 표현했다제안한 지원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을 풀가동했고, 전쟁비축물자를 다 내놨으며, 직물을 대느라 학생들에게 교복을 정상적으로 지급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북한의 선전용 제의는 항상 일축해왔고 당연히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는데, 전두환 정부가 전격적으로 북한 제의를 받게 한 것이다이 사건은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농산물과 제조품의 수준을 알게 되었고 북한이 이러한 대규모 물량을 어떻게 장만해서 우리측에 전달해주는지 그들의 수송체계나 능력을 보는 기회가 됐다.

김일성이 허세와 북한정권의 힘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또 이러한 인도협력을 통해 한동안 끊어졌던 적십자회담이 재개되고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이 성사되는 등 긍정적 파급효과가 있었다.

 

해외동포와 이산가족문제의 부각

역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방송 기록 세워

 

1982815일 우리 정부는 북한을 포함한 모든 공산권 거주 동포에게 우리 사회를 개방한다고 선언했다. 처음으로 공산권 국가에 거주하는 동포에게도 자유롭게 모국을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

1983년에 KBS가 특집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내보냈다. 이 방송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켜 피난 등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이 연락을 취해 서로 상봉, 재결합할 수 있게 해주었고 TV를 보던 국민은 눈시울을 적셨다. 1983630일부터 1114일까지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으로 이산가족 찾기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이 방송은 역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방송이란 기록을 세웠다

 

 

  전두환 대통령과 장세동 경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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