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 북한에 제의...정부의 통일정책 이끌어[기획] 56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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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재식 통일원 장관 |
손 장관은 국회에서 이 대북실천사업 제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남북 간에 가장 실현 가능한 사업들을 골라 정부차원에서 제의한 것이다. 북한 측이 동의한다면 잠정 협정의 테두리 안에서 언제라도 실시가 가능하다.
20개 사업을 반드시 일괄적으로 타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선별적으로 호응해 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이에 대비해 정부 유관 부처 간에 이미 복안을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북한은 요지부동이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명의로 한국 측의 통일 방안과 더불어 손 장관이 제의한 20개 항의 시범사업까지도 모두 거부하고, 대신 북한이 제의한 바 있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고집했다. 1982년 2월 24일 손 장관은 처음으로 대통령 업무보고를 했다.
손 장관은 전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의 국력과 체제우월성을 바탕으로 북측이 대화의 광장에 나오도록 계속 촉구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외 남북한 각 분야 역량과 총력을 비교·분석하는 심층연구를 추진하고, 이를 토대로 향후 추세와 전망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 통일안보의식 강화위해 2만2천명 초청
해외연수 실시보고...대북 장관급 회담제의
3월 중에 서울이나 평양 또는 판문점에서
장관급 수석대표로 ‘남북한고위회담’ 개최
노태우 장관을 수석대표로 하여 정부와
정당·학계인물로 구성된 9명의 명단 발표
그는 또 남북한 고위 대표회담의 의제로 ▲통일헌법을 마련할 민족통일협의회 구성과 남북관계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회담을 개최하는 문제 ▲북한쪽이 지난 10일 제의한 남북정치인연합회의(남북한 대표 각각 50명씩의 ‘남북정치협상회의’)에 관한 문제 ▲남북간의 교류협력·사회개방과 긴장완화를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제반문제를 제시했다.
북한은 통혁당 방송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주장하며 비난·거부했다. 이즈음 손 장관은 통일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며, 통일원의 청소년 통일교육 방침을 밝혔다. 국회 질의답변 과정에서 통일연구소가 특별과정을 두어 대학생을 연수시키고 근로청소년들을 위해 공단 등을 순회하면서 통일안보교육을 확대 실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 당국 간의 대화를 촉구하며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의 진지한 협의를 재차 제의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파격적인 공산권 거주 동포의 자유왕래 보장선언도 했다.
“북한을 포함한 모든 공산권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우리 사회부터 먼저 개방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 형제동포들은 누구나 자유롭고 안전하게 대한민국을 내왕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이다.”
손 장관은 보충 설명시 ‘자유왕래’에 대해 조건 없이 대문을 활짝 열어놓겠다는 의미라며 북한의 반응과 상관없다고 말했다. 북한주민도 오면 좋겠지만, 북한당국이 놓아 보내줄 리 없으므로 결국 수혜 대상은 200만 중국교포와 40만 재소련 교포였다.
북의 호응을 기다리며, 손 장관은 틈나는 대로 국민교육에 앞장섰다. 통일원의 업무를 정책개발과 교육·홍보로 못박고는 솔선수범해서 각종 강연회의 강사를 자청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다니며 전국을 누볐다.
해가 바뀌어 1983년이 된 1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을 제의하고, 의제로 북한이 좋아하는 긴장완화와 전쟁재발 방지, 통일방안 등을 협의하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같은 날 우리 제의를 밀어내고, 주한미군 철수문제만 다루는 제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를 역 제의했다.
손 장관은 대북 성명을 통해 「남북한 당국 및 정당·사회단체 대표회의」를 빠른 시일안에 개최하되, 이 회의에서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회담 개최 문제와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문제를 협의할 것이며, 우선 실무급 예비회담을 3월중에 판문점 또는 서울과 평양에서 갖자고 말했다.
당국을 포함한 정당사회단체 대표회의를 역제의하니, 북측은 아예 우리측에 나와야 할 사람까지 지정하는 등 대화판을 깨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북한이 호전적으로 나왔다. 대북제의한 날과 같은 날인 2월 1일 북한은 방어 목적의 한미 ‘팀스피리트 83’ 군사훈련에 대해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 1호로 ‘준전시상태’를 선언하면서 북한주민에게 전쟁 위기를 조성했다.
1984년 북한이 온건책을 펴 남북관계에
대화의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 첫 움직임이
북한이 그해 1월 10일에 제의한 3자 회담
민족의 염원 거역하지 말고 성실한 자세로
남북한당사자간의 대화에 호응할 것 강조
아웅산 테러 범죄부인에 남북대화 멀어져
통일원은 1983년 업무보고에서 민족의 장래문제, 남북한 현안문제, 통일 주변여건 조성문제를 삼위일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통일 대화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삼고, 남북대화를 적극 유도하겠다고 보고했다.
1984년이 되자, 북한이 한 해 전의 대형사건으로 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목적이었는지 온건책을 폄으로써 남북관계에서 대화의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한 해였다. 그 첫 움직임이 북한이 1984년 1월 10일에 제의한 3자 회담이었다.
그러자, 손 장관은 대북성명에서 “남북한당사자간 회담이 진행되면 한반도문제와 관련이 있는 관계국들이 참가하는 회담도 개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측은 민족의 염원을 더 이상 거역하지 말고 성실한 자세를 가지고 남북한당사자간의 대화에 호응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이 거짓말로 아웅산 테러 범죄를 부인하자, 남북대화는 일순 멀어져갔다.
전 대통령은 여전히 북한에 적극적이었다. 1984년 8월 20일 전 대통령은 남북간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관계개선을 위해 남북한교역 및 경제협력교류를 제의했으나,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 장관은 대통령 제의를 뒷받침하는 후속 계획으로, “정부는 대통령의 남북한경제협력제의를 계기로 남북한수출입현황과 구조에 대한정밀분석을 토대로 교역과 경제협력이 가능한 품목의 시정, 세부적 실천 방법 등 구체적인 계획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다”고 말했지만, 북한은 요지부동이었다.
남북관계 최악의 상황에서 홍수 피해에
북측 뜻밖의 제의... 남측 이재민들에게
쌀과 옷감, 시멘트 등 인도적으로 지원
1984년 9월 14일 우리정부는 북한에서
쌀 5만석, 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톤
기타 의약품 등 물자 받겠다는 의사전달
이런 남북관계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나라 중부에 매우 드문 홍수 피해가 났다. 1984년 9월 초 문산 등 임진강변 경기 북부 일원에 5일간 내린 집중호우로 수해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예기치 못한 사태 전개가 일어났다. 이때 북한이 뜻밖의 제의를 했다.
9월 8일 수해를 입은 남측 이재민들에게 쌀과 옷감, 시멘트 등을 인도적으로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1984년 9월 14일 우리정부는 북한이 제공하겠다는 쌀 5만석, 천 50만 미터, 시멘트 10만톤, 기타 의약품 등 구호물자를 받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진행된 북한의 수재물자 인도·인수 과정은 손재식 통일원 장관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북한의 인도적인 수해물자 지원과 남북간 협력이 한동안 중단됐던 남북적십자회담의 재개를 이끌고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이라는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는 등 남북관계 전반에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 북한 수해물자 지원차량 |
이어 1984년 10월 20일, 정부는 신병현 부총리 명의의 서한을 통해 남북경제회담 개최를 제의했고, 북한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11월 15일 판문점에서 첫 남북경제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11월 20일에는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도 판문점에서 이루어지며 남북대화 채널이 다각도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손 장관은 이 같은 흐름의 주역이었기에 새해 통일정책 방향에 대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북한의 주장도 최대한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대화확대의지를 분명히 했다.
1985년이 되었다. 전 대통령은 1월 9일, 새해 국정연설을 통해 북한에 재차 남북 당국 최고책임자 회담을 제의했다. 이제야말로 손 장관도 그동안 일관성 있게 북한과의 소통, 교류하던 노력의 결실을 거둘 때였으나, 아쉽게도 개각 때 교체되면서 임기를 마무리하고 퇴임했다.
![]() 손재식 장관 (중앙의 키작은 분) |
[인물 약력]
1934년 경남 밀양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56년 공직에 임용, 1969년부터 내무부 근무, 1976∼1980년 경기도지사, 1980∼1981년 부산직할시장, 1985년 2월 통일원장관 퇴임, 1988년 4월 21일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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