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유가 있거나 딱히 급히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자연히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보게 되면 우선 잡다한 머리 아픈 일로부터 해방할 수가 있다. 뿐만이 아니라 각자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채널 선택권이 주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가 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하다. 또한 텔레비전은 명령하거나 강요하질 않는다. 게다가 신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덩달아 흥이 나 저도 모르게 탄성도 지르게 되고 갈갈대기도 하며 어깨춤도 추게 되고 고성방가도 하게 된다. 작은 행복이 따로 없다.
그렇긴 해도 텔레비전이 마땅찮을 때가 많다. 연예인들의 놀이터 같을 때도 있는 건 애교로 넘어가도 누구 말마따나 하도 같잖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여기저기 화면을 차지하고 다녀서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근래에는 텔레비전에서만 아니라 유튜브에서도 맹활약들을 하는 것 같다. 직장을 잃은 가장에게 천만다행이도 일터가 돼주니 다행인지는 몰라도 함량 미달 출연자나 혐오감을 주는 인물이 열변을 토하는 걸 보면 역겨울 때가 많다. 특히 이런 꼴을 시사 프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더 해서 담당 PD에게도 거부감이 있다. 왜 하필 저런 사람을 출연시켜 강제로 참게 만드나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불만은 또 있다. 출연자에 대한 직함 소개다. 방송에 앞서 직함을 소개하는 건 괜찮은데 호칭을, 왜 전직(前職) 직함을 생략해 부르냐는 것이다. 아무 때나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다니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다. 특히 시사프로에 출연하는 인사 중에 유난히 전직을 밝히는 경우가 많은데 회고록 발표장이 아닌 이상 이젠 그만 출연자의 개인 선전장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PD가 나서면 능히 마무리할 수 있다.
어떤 이가, 한때 유명했던 분인데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 베개에 눈물을 적셨다고 한다. 아침이면 누구나 다 깨기 마련이고 눈을 뜨게 된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건 억지로 눈을 뜨건 눈을 뜨면 자연히 그날 할 일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예 눈을 뜨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개중에는 부채에 너무 시달려 도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고 꼴 보기 싫은 세상 조금이라도 덜 보겠다는 사람도 있겠다. 문제는 그럴 수만 없는 경우다.
아무리 풍족하고 여유 있게 사는 늙은이라도 언제까지나 마음 편하게 살지는 못한다. 생명에는 시한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이 들수록 잠이 줄어 꼭두새벽에 눈을 뜨게 된다. 눈을 뜨면 일어나게 되는데 일어나는 건 습관적일 뿐이다. 일어나야 꼭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오늘은 뭘하며 지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할 뿐이다. 외부 사회적 활동이 끊긴지 오랜 노인일수록 더욱 할 일이 없다. 일어나 뭘 할 건가? 운동을? 책을? 청소를? 손주 돌봄? 사회봉사? 텔레비전 보기? 건강은 어떤가?
며칠 전 갑자기 텔레비전이 꺼졌다. 리모컨을 이것저것 눌러도 깜깜이다. 가입한 인터넷에 전화를 거니 계속 통화 중이다. 애들 집에 걸어도 속수무책이다. 아파트 관리소에 알아봐도 마찬가지다. 순간 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한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으면 뭘 하지? 할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책이나 보고 있어? 눈도 침침한데 몇 분이나 볼 수 있을 건가. 그놈의 텔레비전이 국민 민도를 떨어뜨리더니 이젠 암흑천지로 몰아넣어?
멀건이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눈을 감고 있자니 더 답답해 올 뿐이다. 텔레비전이 없으면 암흑세계가 오는 건가? 텔레비전이 없으면 못 사나? 날씨도 고약한데 바깥바람 쐬로 나갈 수도 없고... 텔레비전이 꺼진 지 불과 몇십 분도 되지 않았건만 이럴 수가 있나. 마침 낮잠 잘 시간이 아니었으면 어쩔 것이었나.
낮잠 속에서 마무리란 단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어지간히 나이가 들면 하던 일도 마무릴 해야 하는 데 나에겐 마무리해야 할 일이 없는가? 없을 리 없다. 자잘한 책상 정리부터 마무리할 일이 너무 많았다. 유서는? 할 일이 너무 많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된다. 마무리할 일이 너무 많으면 그것 역시 안 하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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