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도발 김일성은 정작 평안도로 야반도주

송두록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3/11/10 [11:43]

6·25도발 김일성은 정작 평안도로 야반도주

송두록 논설위원 | 입력 : 2023/11/10 [11:43]

19501012, 김일성은 국군이 평양 땅에 들어가기 일주일 전인데도 극비리에 평안도 덕천으로 야반도주했다. 그 전, 915UN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101일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103일 아들 김정일과 자신의 가족들을 만주 땅으로 도망시켰다. 특히 김일성은 1011일 방송을 통해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며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면서 싸우라고 해 놓고 정작 본인은 도망간 것이다. 북측 후세 사가들은 저 살겠다고 도망간 김일성을 백전백승의 강철 령장‘, ’천재적 군사 전략가라고 치켜세웠고. 북한 주민들은 지금도 그렇게만 알고 있다. 공산당의 선전 선동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민성금운동에 동참하는 의미로 이승만 대통령 기념재단에 500만 원을 기부했다. 911일 시작된 국민성금운동이 시작한 지 4일 만에 국민 후원자 12천 명에 모금액 264천만 원을 넘어섰고, 1026일 기준 약 55억 원이 모였다. 어떤 대학생 단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건립 후원 우표를 출시, 판매하면서 수익금 전액을 기념관건립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히 세대 차이, 지역 차이를 넘어 전 국민적인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배우 이영애 씨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건립에 5,000만 원을 기부했다가 거의 집단 린치에 가까운 곤욕을 치렀다. 이영에 씨는 우리나라를 북한 무력침공으로부터 지켜내 지금 우리 아이들이 김일성 일가의 야욕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자유롭지도 않은 북한과 같은 나라에서 살지 않도록 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영애 씨가 이승만의 과거를 잘 모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잘 모른다고 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과거 중 하나가 6.25 전쟁 때 서울을 사수하라고 해 놓고 자기만 살겠다고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갔다는 선전 선동적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그렇게 이야기한 적도 없고 무책임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지난 몇 달 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하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이 전무한 상태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 참전)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 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리나라를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1950627일 밤 9시에 한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 방송 내용이다. 6.25 전쟁 때 인민군의 탱크 수가 무려 242대였는데 국군은 0대였다. 국군이 북침은커녕 방송에서처럼 싸울 것이 전무한 그런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김일성의 도발 지시에 따라 침략을 했건 어쨌건 어떻게든 동족 간의 상잔을 막고 끌어안으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애 노력이 보일 뿐이지 그 어디에 국민더러 나 대신 서울을 사수하라는 말이 있었나.

 

이승만 대통령은 625일 새벽 4시 인민군이 남침한 사실을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보고받았다. 26일 두 차례, 27일 새벽 2시 한 차례 모두 세 차례나 각료들의 피난 권고를 듣고도 서울 사수 의지를 역설하며 떠나지 않았다. 본인이 인민군에게 체포되면 미국 등 자유 우방 국가들이 서둘러 도와줘서 동족상잔을 조기에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국충정뿐이었다. 그랬다가 27일 새벽 3시 당시 치안국장이 적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그때서야 강권에 못 이겨 대구로 피난 갔는데 그 보고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벼락같이 서둘러서 오전 11시에 다시 기차를 타고 함락 직전의 서울로 되돌아갈 정도로 나라와 국민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일성처럼 인민들더러 평양을 사수하라고 해 놓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거나 국민에게 무책임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휘황한 선전 선동에 넘어가지 말고 우리 역사를 반듯하게 바로 세워서 후손들에게 넘겨줘야 할 책무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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