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사회 최근 이슈는 지난해 10월 19일, 서울시 양천구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독신 탈북여성 김정혜(49) 씨가 겨울옷을 입은 채 백골상태로 발견된 사건이다. 최소 1년 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계속되는 무연고 탈북민의 죽음이다. 탈북민사회서는 더 이상 정부(통일부, 남북하나재단, 전국하나센터, 지방자치단체)에만 기대하지 말고 자신들이 어떤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탈북자동지회 서재평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고(故) 김정혜 씨 사망을 어떻게 보나? 고인은 생전에 다른 탈북민의 취업소개, 심리상담, 생활안내 등을 맡은 남북하나재단 전문상담사로 근무했던 경력이 있을 정도로 타인의 모범이었다. 그만큼 말 못할 고통과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후 고인의 은행통장에는 달랑 40만원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미납된 관리비는 수백 만 원 가량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었던지, 아니면 무슨 특정한 사연이 있었지 않았을까 한다.
-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지난 2019년 8월 서울 관악구서 발견된 탈북여성 고(故) 한성옥 모자(母子) 아사 사건 때도 해당기관(남북하나재단)이 대책을 세운다고 했다. 그런데 관련회의 몇 번하고 그치는 그야말로 탁상공론에 그치고 만 것이 너무나 실망스럽다. 이번 김정혜 씨 사망도 지역 하나센터에서 집 방문을 하고 관계기관(통일부)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 기관은 산하 기관(남북하나재단)에 재조사를 지시했다. 이렇게 서로 문제를 떠미는 식으로 행정서비스가 주먹구구방식이다.
당연히 있다고 본다. 냉정하게 말하면 망자, 해당기관, 그리고 우리. 이렇게 여러 측면에서 문제의 책임구분을 살펴봐야 한다. 림일 작가가 고(故) 한성옥 모자 추모기간 반성의 의미로 신문에 쓴 “한성옥 母子는 탈북민들이 죽였다”는 제목의 칼럼을 일부 탈북민들이 항의해인터넷에서 내려졌으니 참 기가 막히다. 우리가 부족했고 미숙했다는 모습을 보일 때 여론이나 정부서도 공감하는 것도 모르니 말이다. 한성옥 모자 사건 때 아쉬운 것이 있었다. 3만 탈북민이 하나로 뭉쳐 정착과 복지정책에 대해 정부에 특별히 요구할 수도 있었는데 분향소 장례문제가 특정 정치집단을 위한 투쟁행위로 변질되었으니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번 김정혜 사건도 비슷하다. 사유가 밝혀지지 않은 백골상태로 발견된 시신을 분향한다고 해서 영혼을 달래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탈북민 분향소를 아파트단지에 차렸으니 주민들이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애쓴 보람이 전혀 없었다.
- 그 이유는 어떻게 보는가. 탈북민사회서 특정사건이 발생하면 탈북단체들이 힘을 모아 대책요구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일도 대중의 공감을 받아야 인정이 되지, 결국은 오래 못가는 법이다. 내부 불협화음, 갈등, 재정문제 등이 주요원인이다. 사회생활을 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도덕성인데 그것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무연고 탈북민의 사망 등 특정사건 발생하면 탈북단체들 모두 힘을 모아 대책을 요구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어 내부 갈등, 재정문제 등이 주요 원인 어느 일이든 대중들의 공감을 받아야
- 탈북민 사망 관련 대안이 있다면. 통일부에 등록된 전국의 탈북민 단체가 대략 70~80개가 있는 줄 안다. 지방자치단체(전국 시·군·구)에 등록한 단체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단체장들이 사명감을 갖고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가칭 ‘탈북민119’ 같은 사이트나 커뮤니티를 만들어 탈북단체장들이 모두 참여하면 된다. 요양복지 분야의 자격증을 가지고 현재 활동 중인 탈북단체장도 제법 많은데 그 중에 누가 대표직을 맡으면 좋을 듯싶다. 구체적으로 말해 사고는 예고 없이 발생한다. 너무 뜻밖의 사고를 당하는 유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기 마련이다. 이럴 때 ‘탈북민119’에서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면 좋지 않겠는가. 평시에는 꾸준히 사고예방 정보를 알려주면 된다. 가장 중요하게는 정부기관에서도 탈북민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으면 좋겠다. 어떤 때는 개인정보 차원서 어렵다고 하는데 생명보다 우선이고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 20대 대선에서 탈북민들 투표가 많이 갈렸다. 지극히 정상이라고 본다. 선거에서 무조건 한 정당의 한 후보만 지지한다면 북한과 뭐가 다르겠는가. 탈북민도 민주사회 남한에 왔으면 남한 국민으로 살기에 선거에서 양당(보수·진보)을 지지하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서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탈북민도 제법 있은 걸로 안다. 원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진보정당이다. 그런데 남한서는 좀 다르게 되어있다. 북한인권을 외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 진보정당 정책이 바뀔 수도 있지 않는가.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체이기에 언제든 바뀐다. 또 그래야 정상이다. 진보정당이 사회적 약자인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고 북한주민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국민의 박수와 표를 받을 일이 분명하다. 586세대의 일부 주사파 세력에 의해 북한독재정권 눈치 보기에 급급한 진보정당의 문제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
통일부에 등록된 전국의 탈북민 단체 대략 70~80개...지방자치단체에 등록한 단체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 사고는 예고 없이 발생...뜻밖의 사고를 당하는 유족이나 사람들 당황하기 마련 단체장들이 사명감 갖고 전국 네트워크 ‘탈북민119’같은 사이트 형성하면 좋을 것
- 진보정당에는 탈북의원 한 명도 없다. 거두절미하고 잘못된 것이다. 북한주민 대표인 탈북민의 90%가 노동자, 농민, 사무원, 군인 등 평민출신이다. 이들 중 대중의 공감을 받고 남한생활도 20년 쯤 되는 참신한 탈북민이 다음 총선에서 진보정당 탈북국회의원이 되었으면 한다. 그동안 보수정당에서 탈북의원 3명을 탄생시켰다. 김일성대 교수(조명철), 고위외교관(태영호), 꽃제비 출신(지성호)인데 2명은 북한의 간부계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솔직히 말해 탈북민 사회서는 허탈해하고 실망감을 나타냈다.
- 일리가 있는 소리이다. 지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보수정당 탈북국회의원(지성호)이 탈북민과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묘비 닦기 주변정리 등 자원봉사를 했다. 만인의 박수를 받을 일이다. 호국영령들에게 경의를 표하는데 정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가령 내일 통일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북한주민들이 진보정당에 “잘나도 못나도 탈북국회의원 3명이나 탄생시켜준 보수정당이 고맙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 탈북자동지회를 소개해 달라. 지난 1999년 2월에 창립된 사단법인 ‘탈북자동지회’는 김일성 일가 수령 독재체제의 타도와 북한인권과 민주화실현, 북한실상 바로 알리기 운동, 북한주민 돕기, 탈북민들의 권익 및 정착지원을 지키기 위한 대표적 탈북민 조직이다. 생전에 황장엽 선생이 명예회장이셨고 초대회장은 김덕홍 전 조선여광무역회사 총사장, 이후 홍순경 전 태국주재 북한참사, 윤성수 선생,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홍순경(재선), 최주활 전 인민군 상좌가 회장직을 이어왔다.
‘탈북자동지회’ 99년 2월 창립...김일성 일가 수령 독재체제 타도, 북한인권과 민주화실현, 북한실상 바로 알리기 운동, 북주민 돕기 등 탈북민들 권익 및 정착지원 돕기 위해 조직
- 고향이 어디인가. 함남 단천이다. 1970년 8월생이다. 형제는 3형제의 막내였다. 부친은 단천시 수의방역소 소장, 모친은 주부이었다. 1994년 단천광업대학을 졸업하고 단천지질실험분석연구소에 배치를 받았다. 지하의 지질시료분석을 통한 자료를 작성하고 그에 근거해서 지질도면 분포를 만들어 지하자원을 찾는 방향설정을 업무로 한다. 기억에 남는 일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달(7월)에 김일성이 사망했다. 그해 4월부터 식량배급을 받지 못했다. 1999년까지 배급은 전혀 없었는데 사람들은 이 시기(3~4년간)를 ‘미공급시기’ ‘식량난시기’ 등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상부에서 인민반을 통해서 ‘미공급’ ‘식량난’ 등의 표현 대신 ‘고난의행군시기’로 써야 한다고 포치(회람, 공지)했다. 부모님이 연로하여서 집에 있었고 형님 두 분은 출가하여 자기 살림을 했다. 내가 가장이니 방법이 없었다. 사금, 송이버섯, 수산물 장사를 하였는데 현지에서 구입해 타 지역에 가서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겨우 밥을 먹고 살았다.
최근 정보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시기보다 더 혹독한 고생 하고 있어 ‘어느 집 누구 죽었다’는 말도 인민반장, 기관장 책임자만 해 일반주민들이 하면 단련대에 끌려 가...공포정치 극에 달해 탈북민, 국민들 외면하지 말 것을 기대
- 남한에 대해 어떻게 알았나? 2000년 초 온성군 남양구로 중국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갔다. 여기는 중국 도문과 마주한 지역으로 대 중국무역과 밀수가 활발히 진행되는 곳이다. 공교롭게도 친척과 연락이 잘 안 되어 며칠을 묶었고 어느 날 친숙해진 민박집 주인과 라디오를 들었다. 최초로 듣는 남한의 방송인데 처음에 내 귀를 의심했지만 점차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다. 며칠 뒤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안전부에 가서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 언제 탈북을 하였는가. 안전부조사가 보위부조사로 넘어갈 판이었다. 2000년 4월 1일 국경경비대원에게 2천원을 주고 두만강을 건넜다. 온성군 맞은 켠이 중국 도문이고 여기서 2시간 정도 가면 연길이다. 거기에 고모집이 있고 흑룡강성에 큰고모 집이 있다. 연길을 거쳐 흑룡강성으로 가던 중 조선족청년을 만나 조선족교회에 가게 되었다. 10개월 후 서울에서 온 천기원(두리하나선교회 대표)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후 2011년 7월 몽골로 이동하여 24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2006년까지 연세대학교 통일학석사 과정을 다녔고 통일부 산하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자원개발실에서 3년간 근무했다. 지난 2009년 ‘NK지식인연대’ 사무국장을 1년간, 2010년부터 ‘북한민주화위원회’에서 사무국장을 5년간 맡았다. 이후 지난 5월까지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하다 7대 탈북자동지회장을 맡게 됐다.
- 최근 어려웠던 일은 무엇인가? 탈북자동지회가 설립되어 23년 동안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가 지나갔다. 진보정부 3회, 보수정부 2회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지원을 해주었는데 같은 진보정부인 문재인 정권은 달랐다. 많은 탈북단체들이 문재인 정부에서 시무조사를 받고 압박을 받았다. 문 닫은 단체도 있다. 우리 단체도 사무실 유지비 정도 받던 정부지원이 문재인 정부에서 완전 끊기었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정말 안타깝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최근 정보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시기보다 더 혹독한 고생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일상에서 “어느 집 누구 죽었다!”는 말도 인민반장이나 기관(공장, 농장, 학교 등)책임자만 말하지 일반 주민들이 말하면 단련대에 끌려간다고 한다. 그만큼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을 탈북민은 물론이고 남한의 국민들이 부디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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