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고수들과 손맛전쟁...탈북민, 한국이 인정하는 조리명인 되다[인터뷰] 서울 마곡동 ‘안영자면옥’ 안영자 대표민족최대의 명절인 추석(9월 10일)이다. 들판의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요로운 이날, 우리네 일상에서 바쁘게 살던 사랑하는 가족과 친인척이 한 자리에 모여앉아 정겨운 회포도 나누며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낸다. 명절하면 맛있는 음식이 있는 것이 기본이다. 탈북민에게는 남한서의 생활이 매일 명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북한서 살 때는 일반주민들이 1년에 김일성·김정일의 생일 등 국가명절에나 겨우 돼지고기와 떡, 술, 쌀밥을 먹어볼 수 있었다. ‘어버이 수령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크게 올리고 받았다. 그에 비하면 남한은 어떠한가. 1년 365일 내내 동네슈퍼마다 고기, 생선, 과자, 쌀, 떡, 빵 등을 가득 쌓아놓고 판매한다. 전기와 물, 연료 걱정도 없으니 남한서 사는 것이 꿈만 같다는 탈북민들이다.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북한음식전문점 ‘안영자면옥’안영자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안영자 면옥’의 소개를 부탁한다. 지난 2020년 8월 서울시 마곡동에 오픈했다. 대로변 1층에 30평 규모, 좌석은 60석이다. 모든 메뉴가 평양옥류관의 물냉면, 비빔냉면, 온반, 녹두지짐, 초계탕, 육개장, 아바이순대, 왕만두 등이다. 대표적인 북한음식전문점이다. 서울지하철 5호선 마곡역 6번 출구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으며 영업시간은 오전 11시부터 밤 9시까지다. 식당 안은 언제나 청결하고 깔끔한 환경이라고 자부한다. - 식당의 대표 메뉴가 냉면이라고 했다. 맛도 자신 있는가? 면발이 쫀득쫀득하면서도 아주 부드럽다. 기존에 잘 끊어지는 식감대신 메밀과 감자전분의 일정한 배합으로 순하고 감칠맛 나는 것이 특징이다. 면발의 생명은 숙성된 가루반죽과 면을 끓는 물에 삶는 시간, 찬물에 씻는 방법 등에 있다. 냉면사리는 물론이고 그 위에 올리는 꾸미(소고기, 계란, 무, 오이, 잣, 지단 등)와 육수도 전부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그 유명한 평양옥류관에서 실습하며 배운 방법이다. - 평양냉면이 유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한반도 중부 평안도 지방에서 재배되는 메밀을 주재료로 만든 평양냉면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동치미육수 때문이다. 이전에 다른 지방에서는 더운 국물에 말아먹은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남한의 잔치국수라고 할 수 있다. 국수는 4계절 다 먹는 음식이었지만 평양냉면은 특히 겨울철 대표 음식이었다. 이열치열(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뜻), 이한치한(추위는 추위로써 다스린다는 뜻)의 생활신조가 깊었던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음식이기도 하다.
냉면 면발이 쫀득쫀득하면서 부드러워 기존에 잘 끊어지는 식감대신 메밀과 감자전분의 일정한 배합으로 순하고 감칠맛 나는 것 특징... 면발 생명은 숙성된 반죽과 삶는 시간, 찬물에 씻는 방법에 있어
- 서울에 와서 맛이 좋았던 음식이 있나. 글쎄,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다소 신기하기도 하다. 북한에 비해 경제적으로 50~60배나 발전된 남한이지만 왠지 세상에 자랑할 만한 대표적 서울음식은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우리네 일상에서 서울이름이 붙은 음식은 ‘서울불고기’ 정도다. 외국인들이 한국음식 하면 ‘평양옥류관냉면’을 먼저 떠올리기도 한다. 정부가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표적 서울음식 개발 및 지정에 노력해주었으면 한다. - ‘냉면의 날’이 있다는데 무슨 소리인가. 지난 2021년 12월에 나와 남한사람인 장기철 ‘북녘식당친친’ 대표님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만든 대한민국 유일의 ‘냉면의 날’이다. 작년에 시작해 올해 12월에 2회, 다음해 12월에는 3회 등 꾸준히 지속적으로 이어갈 예정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자기나라 특정음식의 날이 있다. 일상에서 알고 있듯이 베트남 쌀국수, 중국 교주, 이태리 피자 등 냉면이 남북한 대표음식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북의 대표음식으로 남한에서 대중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매해 12월에 개최하는 이유는, 시원한 동치미국물에 말아먹던 원조 평양냉면은 원래 겨울음식이다. 아직도 북한의 지방에서나 일반주민들은 여름에 냉면 먹기 힘들다. 남한의 경우 냉장시설이 잘 발달되었으니 한 여름에도 살얼음 동동 띄운 냉면을 1년 4계절 먹을 수 있다. 겨울음식인 냉면을 제대로 홍보하자는 취지에서 12월로 결정했다.
‘냉면의 날’은 남한사람 ‘북녘식당친친’ 대표와 공동으로 준비하여 만들어... 작년에 시작해서 올 12월 2회, 내년 3회 등 꾸준히 이어갈 예정
외국 사례 보면 각 나라 특정음식 날 있어 베트남 쌀국수, 중국 교주, 이태리 피자 등 냉면이 남북한 대표음식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북의 대표음식으로 대중화할 필요성 느껴
- 어떤 효과가 있었는가. 전국 30여개 냉면전문점이 동참을 하였다. 작년 12월 14일부터 23일까지 10일간 “겨울 제철을 맞다”라는 주제로 제1회 ‘냉면의 날’을 열었다. 역사적 사료에 의하면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평양과 서울에 냉면거리가 형성되었을 만큼 그 기세가 대단했다. 행사는 복순도가, 발효건축, 호랑이막걸리, 봉밀가평양냉면, 봉피양 등이 협찬했고 안영자면옥, 북녘식당친친, 서관면옥 등이 주최하였다. - 동일업종 대표들과의 연계가 잘 되어 있나? 메뉴개발과 식당운영 등에서 서로 좋은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 탈북민은 내가 유일한데 남한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고 반대로 배워줄 것은 배워준다. 언젠가 남과 북이 통일되면 음식만큼은 남한 것, 북한 것 모두 사용해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수십 년간 가졌던 입맛을 짧은 기간에 바꾸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메뉴개발과 식당운영 등에서 정보 교류 남한사람들에게 배울 것은 배우고 반대로 배워줄 것은 배워주고 있어...남북통일되면 음식만큼은 남한 것, 북한 것 모두 사용해야
- 고향이 어디인가. 함경북도 경성에서 1967년에 태어났다. 형제는 4남매의 셋째다. 부친은 OO림산사업소 기사장(기술담당 간부), 모친 OO인민학교 교원(교사)이었다. 1983년 여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요리강습소에 갔다. 인민무력부서 운영하는 초대소(별장)와 특수부대식당이 많았고 요리사를 자체로 양성하겠다는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올려 방침을 받았다. 전국에서 선발된 예비입학생은 42명, 최종 합격자는 나를 포함해 26명, 다소 행운이었다. 더 상세히 말하면 요리강습소의 정규수업은 평양상업대학 교원(교수)들이 했다. 한식을 위주로 가끔 양식과 일도 조금씩 가르쳐주었던 것으로 생각이 난다. 현장실습으로 평양옥류관을 포함하여 시내 이름난 음식점, 호텔, 초대소 등으로 향했다. 또한 조선민항총국(순안비행장)과 각 지방의 공군부대 비행사식당에도 파견실습을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눈길로 요리사들을 보았던 것도 당시로서는 현실이었다. - 해외유학 경험이 있던데. 정확히 유학은 아니고 외국 현장실습이다. 1985년 여름, 3개월간 유효기간의 비자를 받고 중국으로 실습유학을 나왔다. 난생처음 해외서 실기를 포함한 요리를 배운다는 꿈같은 희망을 품고 나온 외국실습인데 종당에는 허탈했다. 3개월간 베이징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대사관 경내 식당에서 주방 일(설거지, 재료준비 등)만 하다가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당시 외국에 잠깐이라도 나온다는 것은 거의 별나라 가는 것만큼 어렵고 희한한 일이었다. - 다른 경력도 말해 달라. ‘평양상업대학’ 졸업증을 받으며 요리강습소의 2년 6개월간 정규 교육을 마치고 1986년 10월에 졸업했다. 이후 인민무력부 산하 고급별장인 함경북도 경성군 온포에 있는 000초대소 요리사로 배치를 받았다. 조선인민군 000초대소에는 김일성 접견대상 외국군사대표단, 무관 등 귀빈들이 자주 왔다. 적을 때는 2~3명, 많을 때는 7~8명 정도였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씩 머물다가 돌아갔다.
함북경성에서 1967년 출생...고등중학 졸업 후 인민무력부서 운영하는 요리강습소에 들어가 요리강습소 수업은 평양상업대학 교원들 맡아 한식을 위주로 가끔 양식도 가르쳐 주기도 해 현장실습으로 평양옥류관을 포함해 시내 이름난 음식점, 호텔, 초대소 등 파견실습을 나가기도
-근무했다는 초대소 현황이 궁금하다. 초대소 종사자들로는 출신신분이 철저하게 검증된 소장(현역군인), 세포비서, 경리원, 통역원, 이발·안마사, 운전수, 요리사, 접대원(서빙), 건물관리원 등 15명이 있었다. 초대소 정문과 주변은 무장한 군인들이 24시간 보초를 섰다. 가구와 소파는 이탈리아제이고 TV와 냉장고, 에어컨 등은 일본제이다. 외국대표단이나 무관들이 타고 오는 차는 독일제 벤츠였다. 귀빈들을 위해 닭곰(삼계탕), 소갈비찜, 약밥, 해산물요리, 빵, 버섯구이, 과일 등이 식탁에 올랐다. - 탈북 한 동기는 무엇인가. 1980년대 부친은 평양의 내각 대외경제위원회 계획부장 직무를 거쳐 해외무역대표로 자주 근무했다. 언젠가 막내 동생이 녹화기로 성인물을 봤는데 보위부에 걸렸다. 부친이 해외서 강제소환, 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호위총국서 근무하던 큰오빠는 철직제대, 나도 000초대소서 강제 퇴직되었다. 마음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후 큰오빠가 사는 혜산으로 갔다. 거기서 며칠 머물면서 ‘도강’ ‘밀수’ 등의 용어를 알았다. 밑돈이 드는 ‘밀수’보다 다소 위험하지만 ‘도강’을 해서 중국에 가면 힘껏 노력을 해서 큰돈을 벌수 있는 일거리가 많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그러던 중 2005년 여름 사전에 브로커와 연계를 갖고 단독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연길에 있는 친척집으로 갔고 거기서 수개월간 머물며 식당일을 했다. 허나 엄연히 탈북자의 신분이니 아무래도 공안의 단속에 신경이 쓰였다. - 한국으로는 언제 왔는가. 잊을만하면 가끔씩 주변에서 북한으로 잡혀 나가는 몇몇 탈북자를 보니 가슴이 섬뜩했다. 이후 8명의 탈북자와 함께 며칠간 사막을 걸었고 국경철조망을 넘어 몽골로 갔다. 2006년 9월, 울란바토르 주재 한국대사관을 거쳐 서울로 왔다. 내가 ‘평양옥류관’ 주방현장 경험을 가진 유일한 탈북민이니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왔다. 요리학원과 음식협회, 호텔식당 등에서 경험발표 및 강연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8명의 탈북자와 함께 며칠간 사막을 걸어 국경철조망을 넘어 몽골로 갔다 2006년 9월 울란바토르 주재 한국대사관을 거쳐 입국 ‘평양옥류관’ 주방현장 경험의 유일한 탈북민 요리학원, 호텔식당 등 강연요청 많이 들어와
-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하였던데. 지난 2014년 고수들의 손맛전쟁으로 불리는 O'live서 만든 요리서바이벌TV쇼, ‘한식대첩2’ 출전하였다. 전국의 쟁쟁한 요리사들이 나와 경쟁하는 행사다. 그리고 지난 2018년 5월 봉평메밀요리경연대회에서 영예의 금상을 수상했다. 한국외식조리협회에서 인정하는 대한민국 조리명인(북한요리 2018-E-001)이 되었다.
2014년 손맛전쟁으로 불리는 O'live서 만든 요리서바이벌TV쇼, ‘한식대첩2’출전...2018년 봉평메밀요리경연대회에서 영예의 금상 수상 한국외식조리협회서 인정하는 조리명인 되기도
북한요리‘북녘식당친친’운영하는 장기철 대표가 실향민 2세로 북한음식에 애정 갖고 열정적으로 꾸준히 영업...탈북민들의 요식업창업과 관련된 일이라면 손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고마운 분
-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가. 서울 연남동에서 북한요리식당 ‘북녘식당친친’을 운영하는 장기철 대표이다. 실향민 2세인데 남한사람으로 이 분만큼 북한음식에 애정을 갖고 열정적으로 꾸준히 영업하시는 분을 아직 알지 못한다. 우리 탈북민들 중 요식업창업과 관련된 일이라면 손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참 고마운 분이다. 시간과 돈, 재능까지 아낌없이 투자해주는 정말이지 우리 탈북민들의 친아버지, 친오라버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남한사람들은 생일에 미역국을 먹더라. 자기를 낳았을 때 어머니가 드셨던 미역국을 먹으면서 어머니의 은혜를 되새긴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좋은 것 같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것은 똑같으나 북한에는 미역이 흔하지 않다. 북한사람들은 생일에 주로 국수(냉면)를 먹는다. 국수처럼 길게 오래 살라는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음식이 귀한 북한서는 국수가 일종의 장수음식이나 다름없다. 서울의 많은 고객들이 ‘안영자면옥’에서 냉면을 자주 드셨으면 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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