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뒤 평양은 건물형태부터 급속히 현대화”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8] 수차 방북 하다 보니 지속적인 북 변화 감지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11/24 [22:14]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뒤 평양은 건물형태부터 급속히 현대화”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8] 수차 방북 하다 보니 지속적인 북 변화 감지

통일신문 | 입력 : 2020/11/24 [22:14]

방북을 돕던 캐나다 최홍희 국제태권도총재역시 갑작스런 별세이후 방북기회는 더욱 힘들어졌다. 이천군의 한 친척으로부터는 가끔 편지가 날아들었다. 내용은 단순한 안부에 불과했으나 나를 기다리는 마음이 절절이 묻어났다.

또 내가 기자신분이니 문필전사로서 해외에서도 꼭 경애하는 장군님을 위해 늘 앞장서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해 못하는 구절 하나는 우리민족을 항상 ‘김일성민족’이라고 부르는 점이다. 한 민족이나 조선민족으로 칭하지 않았다. 아마 북에선 학문적으로 김일성민족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다만 방북신청서 민족구분 란에는 ‘조선족’으로 기입한다.

두 번째 방북 때다. 최홍희 태권도총재와 평양 청류관(신선로 요리전문)에서 점심초대를 받았다. 북한 고위급 일부인사와 해외대표 등 1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대부분 70세 전후 노인들이다. 식사 중 방에서 끽연이 불편해 옆 베란다로 나오니 한 중년사내가 먼저 연기를 뿜고 서있었다.

시내전차가 평양에는 1991년 새로 등장했고

서울에선 못 본 2층 버스가 평양에 운행됐다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왔다한다. 서울 말씨다. “전 토론토에서 왔는데 평양이 생소하네요. 혹시 학교는 어느 고교를 다니셨나요?”

“서울사대부고요.”

“네? 저도 부고인데, 전17회입니다.”

“아, 그래요? 난13회요. 삼성 이건희와 같은 동기이지. 한국 있었을 때도 삼성에서 부장으로 일한 적이 있고.”

단 한명 아는 이 없는 북한 땅에서 동문을 만난 기쁨은 컸다. 그는 북으로 망명한 최덕신 전 외무장관(서독대사 역임) 장남이었다. 최 선배 또한 무척 반가워했다. 따로 만나 그가 먼저 다녀본 북한 곳곳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줘 북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됐다.

나중에 최 선배 어머니인 고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위원장(당시 북한 서열22위)도 소개해줘 가끔 류 위원장과 둘이 쟁반냉면을 같이 하곤 했다. 그 후 류 위원장은 북한이산가족 북측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다. 최 선배와는 90년대 내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상주할 때 가끔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만나곤 했다. 수년전 최 선배나 어머니 류 위원장도 세상을 떠났다.

수차 방북을 하다 보니 지속적인 북의 변화를 감지했다. 서울에선 진작 오래전(1969년)사라진 시내전차가 평양에는 1991년에 새로 등장했고, 서울에선 못 본 2층 버스가 평양에 운행됐다. 서울 거리곳곳 구형 구름다리가 나중 평양에도 나타났다. 인구 규모에 따른 교통과 주민편리 수단으로 보인다.

북한주민과는 만남자체가 힘들어 개별적인

대화는 기대할 수 없어… 친척도 마찬가지

지금은 거의 활용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평양은 낮이고 밤이고 버스, 전차 등 대중교통에는 늘 주민들이 꽉 차 있다. 새로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뒤 평양은 건물형태부터 급속도로 현대화됐다. 2010년 이전과 비교하면 도시 모양새가 확 달라진 모습이다. 방북경험자들은 그간 평양이 천지개벽이 됐다는 평을 했다.

한편 북한주민과는 만남자체가 힘들었다. 개별적인 대화는 더욱 기대할 수 없었다. 친척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단체만남 속에 사적얘길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차라리 호텔에서 매일 식사시간마다 만나는 (조)총련 사업가들이 편했다. 그들은 같은 자본주의하에서 생활해 그런지 솔직했고 꾸밈이 없었다. 도쿄와 오사카등지에서 방북한 재일동포(총련)들이다.

호텔도 재일 사업가들은 1등 실을 활용했다. 평양려관(호텔)에 숙박할 때는 일본 고베에서 온 노인사업가와 가까워졌다. 수산물무역으로 자주 평양에 온다고 한다. “왜 무역거래를 한국보다 북한을 택했습니까. 무역업은 자본주의 국가가 자유롭고 편하지 않으세요?”

“사실 고민을 많이 했지요. 공화국(북한)은 자유는 없지만 민족성이란 게 있지요.” 아니 그럼 남쪽에선 민족성이 없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하려다 그만 뒀다. 소모적인 논쟁은 피했다.

오사카거주 양광우 사장에겐 일본에서 신세를 졌다. 그는 평양 곳곳에 여러 사업체를 두고 북한을 왕래하고 있었다.

북한의 헐벗은 산림을 위해 매년 10만 그루 묘목을 북에 무상공급을 한다고 전했다. 알고 보니 친동생 양래민은 평양봉수교회에서 만난 전도사(안내원)였다. 이후 그는 교회직책을 떠나 형 사업을 돕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형과 동생을 따로 알고 있었다.

양 사장 동생은 일본 북송교포로 평양에 온 젊은 세대에 속했다. 그를 특별히 기억함은 첫 평양봉수교회 방문 시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하고 말한 유일한 북한인이었기 때문이다. 방북한 해외성직자들조차 평양봉수교회, 칠골교회, 장충성당 등 종교기관은 형식만 갖춘 해외용건물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본다.

북한주민과 접촉기회는 우연히 다가왔다. 원산방문 시 송도원 호텔 라운지에서 한 중년여성(재일북송동포)과 마주친 것이다. 오전에는 취재약속이 없어 송도원 호텔 상점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참이다. 갑자기 밖에서 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예전 서울에서 자주 듣던 민방위훈련 사이렌소리다. 안내원이 밖으로 나가지 말고 잠깐 호텔에 머물라고 했다. 그 통금시간이 오래 지속된 것 같다.

마침 함흥거주 그 부인이 송도원 호텔에 들렀다가 역시 발이 묶인 것이다. 호텔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라운지 소파에 둘이 앉아 약30분간 북한 삶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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