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에 주는 자유의 징표 ‘주민등록증’받고 인간의 존엄 알아”

[인터뷰] 백두한라예술단 최순경 아코디언 연주자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09/09 [13:49]

“탈북민에 주는 자유의 징표 ‘주민등록증’받고 인간의 존엄 알아”

[인터뷰] 백두한라예술단 최순경 아코디언 연주자

통일신문 | 입력 : 2020/09/09 [13:49]

북한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생에 대한 사회직장 배치를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강제 집행한다. 이것을 집단진출’, ‘무리배치등으로 부른다. 좋든 싫든 국가정책이니 절대 따라야하며 여기에 속하는 졸업생은 대략 전체의 90%에 해당한다.

나머지 10%는 부모가 당·권력기관, 외화벌이부문 등 특정 분야에 종하는 자식들로 본인의 희망대로 상급학교와 지망한 부분으로 취업한다. 그 이유는 평상시 선생님들에게 뇌물(금품)을 바친 덕분이다. 고교 졸업생들의 직장배치를 하는데서 담임선생의 추천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에서는 당국이 고교 졸업생에게 하는 강제직업배치가 없다는 것에 놀라는 탈북민들이다. 물론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직업을 찾든 창업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국가에 예속되어 종신토록 복종하며 하는 일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또한 꼭 직장인과 사업주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특성에 알맞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도 신기해하는 탈북민들이다. 주민등록증을 가진 국민으로써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근로소득의 세금을 내면 되는 것이다. 서울시 동작구에 자리 한 백두한라예술단 최순경 아코디언 연주자와 찻잔을 놓고 마주앉았다.

 

자신을 소개해준다면.

198711월 남포에서 태어났다. 무남독녀이다. 강선제강연합기업소병원 의사출신인 아버지는 천리마제약공장 지배인을 하셨다. 강철고등중학교 교원(교사) 출신은 어머니는 양정사업소(양곡보관회사) 식량취급자로 근무했다.

강선제강연합기업소는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에서 북한으로 입국하면서 부모가 있는 평양의 만경대 고향집보다 먼저 찾은 산업시설이다. 북한의 교과서에도 실리는 내용이다. 현재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대기업)로 불린다.

부모 경력이 평탄치 못했다는데.

고난의 행군시기 식량배급이 전혀 안 되었다. 제약공장에서는 의료용 알코올 생산을 위해 옥수수를 사용한다. 어느 날 공장문서에 기록된 것과 현물이 차이가 났다. 1톤의 식량이 모자랐는데 직원들이 몰래 훔쳤든 혹은 다른 용도로 썼든지 문제가 생겼다. ()당 검열이기에 그냥 호락호락 넘기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났다.

그 일로 아버지는 법적 책임을 지고 지배인 직무에서 해임되었으며 진료소 의사로 강등되었다.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니 모멸감, 정신적 충격(스트레스)이 상당히 컸다. 그로인해 결국은 뇌출혈을 맞았고 한동안 고생하다가 사망했다.

비슷한 시기 어머니가 다니는 양정사업소에도 검열이 붙었다. 부서 과장이 수년간 식량을 부정 축재했는데 공동책임으로 어머니까지 화를 입었다. 결국 어머니도 직장에서 강제 퇴직되었고 주부가 되었다.

그로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20043월 고등학교를 졸업, ‘천리마금속단과대학’(전문대)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선배언니들의 말을 들어보니 대학시설 관리 및 교육기재 확보 등에 필요한 돈과 자재는 전부 학생들의 몫이라고 했다. 심지어 학업성적마저 담임선생에게 뇌물(·식량)을 얼마나 바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으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후 천리마금속단과대학입학

대학시설 관리 및 교육기재 확보에 필요한

돈과 자재는 학생들의 몫학업성적마저도

담임선생에게 뇌물을 바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서 며칠 간 신중히 고민하다

가고 싶었던 대학이지만 입학 과감히 포기

 

진학 고민을 많이 하였겠다.

어머니가 나 하나를 어떻게든 잘 키우려고 열심히 사셨다. 아버지 사망 이후 홀어머니가 옷·신발 도매 장사를 하면서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형편에 내가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은 며칠 동안 신중히 고민하다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입학을 과감히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생활은 어떻게 하였나.

고난의 행군시기 주민통제가 거의 마비상태에 달했다. 나는 성인의 징표인 공민증등록이 되지 않았고 따라서 직장도 없었다. 속으로 시예술단이나 구역선전대에서 손풍금 연주를 하고 싶었으나 그건 나에게 한 갓 꿈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밥이라도 먹고 살려고 어머니와 함께 가내부업(일감을 받아 집에서 몰래하는 개인노동)을 했다. 담배를 마는 일인데 하루 9시간 노동해서 대략 5보루(1보루=30)를 만드는 것이다. 일당으로 시장에서 옥수수국수 1kg을 사면 끝이다.

아코디언 연주는 언제 배웠나.

5살 때 라디오와 TV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 화음을 맞추는 절대음감이 있었다. 주변에서는 나를 가수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민학교 고학년시절에 체격이 불어나면서 가수 꿈은 접고 악기연주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가 현직에서 잘 나갈 때이었으니 주변에서 부러운 눈길을 많이 받았다.

어떤 음악교육을 받았는가.

11살 때 1년간 중앙예술단 연주자 출신의 스승에게서 개인교습을 몰래 받았다. ‘수강료는 매달 쌀 5kg 혹은 옥수수 10kg이다. 일주일에 5일간, 하루 2시간 수업이다. 사교육이 없는 북한에서 엄연히 불법이지만 음으로 양으로 계속된다.

언젠가 당국의 단속으로 스승님은 안전부(경찰서) 구류장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크게 혼쭐이 났던지 과외교습을 안한다고 했는데 3년 뒤에 다시 하더라. 그만큼 살기 어려워 불법이지만 아이들을 상대로 과외교습을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활동은 어떠했나?

고교 4학년까지 음악소조에 속해 활동을 했다. 오전에는 소속 학급에서 정규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음악소조에서 5~6시간씩 악기연주 훈련을 하는 것이다. 모내기, 가을걷이 계절이면 본교가 동원나간 농장을 방문해 선동공연을 펼친다. 또한 중대 혹은 대대 급의 인민군부대를 방문해 군인들 위문공연을 하였다.

남포에서 어떻게 탈북할 생각을 했나.

20069월 함북 무산의 먼 친척이 어머니에게 재혼자리가 있다며 중매에 나서 나는 어머니를 따라 무산으로 갔다. 새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어머니를 때렸는데 의처증도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어떤 아주머니가 중국에 가면 돈도 벌고 밥을 먹고 살 수 있다고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여주었다. 그때 어머니는 친정아버지가 계시는 남포로 되돌아가겠다고 했고 나보고 너는 중국에 가서 살라고 했다.

언제 두만강을 건넜는가.

무산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탈북희망자(대부분 여성)가 많았다. 물론 누구도 나 탈북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눈치를 보면 다 안다. 그들을 상대로 하는 탈북브로커도 많다. 나는 먼저 중국에서 정착하여 훗날 어머니를 데려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탈북희망자 여성 1명과 두만강을 건넜다. 20073월이다.

 

무산에는 전국서 몰려온 여성 탈북희망자 많아

누구도 나 탈북하고 싶다말하는 사람 없지만

눈치를 보면 다 알아상대 하는 브로커도 있어

중국에서 정착하여 훗날 어머니를 데려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탈북희망자 여성 1명과 두만강 건너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중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브로커의 중계(인신매매)로 흑룡강성 방정현의 심심산골로 갔다. 100% 한족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동갑내기 한족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아이까지 낳았다. 시부모님이 사람을 귀하게 여겨서 너무 좋았다.

3년 뒤 시부모님의 노력으로 북한 남포에 있는 친정어머니를 찾아 무산을 거쳐 탈북 시켰다. 그것이 고마워서 둘째아이까지 낳았다. 그러니 시부모님은 나를 더욱더 사랑해주었고 정말로 친자식 이상으로 잘 대해주셨다.

그런데 탈출할 생각은 왜 가졌나?

우리 마을에 4명의 탈북여성이 중국남자에게 시집와서 살고 있었다. 모두 똑같은 신분이지만 신변안전을 위해 서로 조심하는 편이다. 언젠가 그 4명 중 한 명인 A씨가 우리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는 남조선에 왔으며 정착금과 임대아파트까지 받았으니 중국에서 불안하게 살지 말고 남조선으로 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실 중국에서 살기 힘들어했다. 나는 21살 때 왔으니 그런대로 1년 만에 중국어와 글도 익혔고 소통도 했지만 나이가 있는 어머니는 말과 글도 모르니 답답하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남조선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다.

중국에서 내 호구(등본)가 없기에 하루를 고민하다가 그럼 나도 엄마와 같이 남조선으로 가겠다며 따라나섰다. 어머니와 함께 시내구경(쇼핑)을 간다는 핑계로 시집을 나섰고 심양으로 나와서 브로커를 만나 탈출노정에 들어섰다.

탈출노정을 밝힐 수 있는가?

심양에서 브로커의 안내로 15명의 탈북민이 집합했다. 3가족, 아이들 3, 나머지는 어른들,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산동성 진안으로 이동했고 버스를 타고 곤명으로 갔다. 순수 우리들이 브로커가 시키는 노정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중국을 떠나서 4일 만에 라오스를 거쳐 태국에 입국했다. 다소 쉽게 이동했는데 위험한 고비는 많았다. 중국과 라오스서는 경찰을 피했는데 태국서도 같은 줄 알고 그랬다. 태국서는 반대로 경찰을 찾아가야 한다는 걸 후에 알았다.

한국으로는 언제 왔는가?

2011819, 대한민국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정말로 꿈만 같았다. 공항에서 마중 나온 관계기관 선생님이 여러분은 이 순간부터 신변불안감은 전부 버려도 된다는 말에 목청껏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들어가는 그 시간에 왜 그렇게 하염없는 눈물이 많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사회에 나와서 무슨 일을 했는가.

정부의 조사를 마치고 20121월 사회로 나왔다. 중국에 있는 시집에 미안하다고 전화를 했다. 대단히 격노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어머니가 잘했다. 한국에서 잘 정착하기를 바라며 아이들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했다.

시어머니께 감사했고 아이들을 데려오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인천남동공단에 있는 OO제조회사에 취업하여 1년간 돈을 벌어 큰 아이를 데려왔다. 이후 남편과 둘째 아이까지 모두 데려와서 혼인신고를 하고 잘 살고 있다.

 

정부의 조사마치고 2012년 사회로 나와

인천남동공단에 있는 제조회사에 취업하여

1년간 돈을 벌어 큰 아이, 둘째 아이 남편도

함께 데려와 혼인신고 하고 잘 살고 있어

 

하고 싶었던 음악공부는.

20153월 명지대학교 공연예술학과에 입학하여 4년 뒤 졸업하였다. 북한에서 그렇게 가고 싶었던 전문대도 못 갔는데 남한에서는 종합대학을 다녔으니 그것 하나 만으로도 나는 대한민국에 온 보람이 정말로 크고 자랑스럽다. 2016년부터 탈북민전문 예술단체인 백두한라예술단에서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어떤 공연에서 연주를 했나?

2016625일 영산아트홀에서 있은 ‘6·25 그날 어울림라온 콘서트이다. 한국전쟁 66주년,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남북한이 문화로 승화하고 전쟁 없는 평화를 노래하는 특별공연이었다. 그 무대에서 앙코르 연주까지 했다.

20175월 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 초청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 11월에는 순천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제57회 정기연주회에 초대받아 연주했다. 2회 곡성통일전국종합예술대전에서 북한예술부문 1등으로 통일부장관상을 받았다.

 

2015년 명지대학교 공연예술학과에 입학

4년 뒤 졸업그렇게 가고 싶었던 전문대도

못 갔는데 남한에서는 종합대학을 다녔으니

그것 하나 만으로도 대한민국에 온 보람이

크고 자랑스러워탈북민 전문 예술단체인

백두한라예술단서 아코디언 연주자로 활동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가.

중국인이지만 시어머니이다. 3년간 살면서 나를 친딸 그 이상으로 잘 대해주셨다. 또한 큰돈을 들여서 북한에 있는 나의 어머니를 탈북 시켰고 결국은 우리 모녀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은 것은 시어머니 덕분이다. 다음은 친정엄마다. 지금 13, 11살짜리 내 두 아이를 잘 키워주고 계시니 너무나 고맙다.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북한에서 태어나 살면서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오직 당과 수령이 우선이고 절대적인 사회이니 말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비슷하다. 남한에 와서 주민등록증을 받고서야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위대한지 조금 알았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참다운 자유를 주신 대한민국정부에 정말 감사하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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